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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묘사가 있습니다.

 

 

 

 

 

 

 

 

 

 

 

 

 

 

긴 유언을 남기는 종족,

『우리』는 『너희』를 그렇게 부른다.

 

 

 

 

 

 

 

 

Last word

 

 

w.bitter moon

 

 

 

 

 

 

 

 

 

 

 

아홉 해 동안 나는 그를 찾아 헤맸다. 딱 한 번, 눈에 담은 게 다였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피를 물고 있는 입술이. 더럽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닦아내는 손끝이. 순간 그자가 물고 있던 것이 내 누이의 목이라는 것을 잊을 뻔했다.

 

 

“무슨,”

 

한숨과도 같은 미약한 목소리를 들은 건지, 늘어진 여인의 몸에서 눈을 떼고 저를 쳐다봤다. 그 시선이 무슨 신호인 듯,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줄줄 흘렀다.

 

“무슨 짓이오...”

“뭐라고? 안 들려.”

 

파랗게 질린 한겨울의 입술 사이로 겨우 완성한 말이었다. 초라하고 힘없는 말.

 

“이름.”

“이름?”

“이름을...말하시오.”

“......내가 왜?”

 

몸이 절로 튀어나가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자는 조금의 주춤거림도 없었다.

 

“말하지 않으면, 나도 물어뜯으셔야 할 겁니다.”

 

살의를 담은 눈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던 그자는 한쪽으로 고개를 빼서 퉤, 소리가 나게 침을 뱉었다.

 

“더 못 먹는데. 방금 맛없는 걸 먹어서.”

“사지를 찢어버릴 거다.”

 

목이 졸리도록 강하게 그러쥐는 옷깃에, 눈썹을 찡그리며 잔기침을 했다. 더 강하게 압박하자, 그는 실소를 흘리고 내 뒤통수를 잡으며 말했다.

 

“그 말 내가 하는 게 더 어울리지 않나?”

 

그리고는 돌연 내 입술을 콱 깨물었다. 숨이 절로 한가득 들이켜져 폐가 가득 차는 게 느껴졌다.

 

“윽.”

 

순간 덮쳐오는 공포심에 온 힘을 다해 밀어내자 남자는 둥실, 도약도 없이 뛰어올라 발끝으로 담장 위에 착지했다.

 

“조금만 맛봐. 내가 얼마나 역겨운 걸 먹었는지.”

 

조금이 아니었다. 입안과 밖으로 마구 흘러넘치는 피가 턱을 타고 뚝뚝 흘렀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맛과 향이었다.

 

“사체는 태워서 처리하는 게 가장 깔끔하다. 그리고 혹여나 복수 같은 건 생각하지 마. 네가 날 찾기 전에 넌 죽어. 반드시.”

 

달에 반사되는 실루엣이 내가 무언가에 홀린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들짐승이 그르렁거리듯 걸걸한 호흡이 나왔다.

 

“잊어. 나도, 네 여인도. 없던 일인 듯 살아라. 그러기에는, 내 이름을 모르는 게 나을 거야.”

 

담장에 달려들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꽈악 조여갈수록, 그가 누군가의 손에 잡히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다.

 

”찰나의 삶을 낭비하고자 하면, 끝도 없이 그렇게 된단다.”

“당신은, 나를 잊지 마시오. 아니, 잊지 못할 것이오. 반드시.”

 

달에 반사되어 흩날리는 푸른색 머리카락이, 웃음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빛을 정면으로 받아 드러나는 목소리는 훨씬 서러운 것이었다.

 

“그 말이 너의 유언이 될 것이다, 나에겐.”

 

가볍게 날아오른 남자는 기와지붕 몇 개를 훌쩍 건너뛰어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누이의 넋 빠진 몸을 무겁게 안아볼 수 있었다. 포효하는 울음은 덤이었다. 열아홉, 처음 느껴본 죽음의 무게였다.

 

 

 

 

 

 

 

 

 

 

 

길고 긴 유언집의 347페이지를 읽어내렸다.

이 유언가는 참으로 지루하고 긴 이야기를 써놓았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죽음에 대해 다룬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죽음보다 책에서 다루는 죽음이 훨씬 더 생동감 넘치며 재밌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것이다, 죽음은. 별 볼 일 없는 게임 같달까, 쉽게 꺾이는 겨울 나뭇가지 같은 거다.

그러나 『너희』 인간이라는 종족은 그 죽음이라는 것 하나로 새로운 이야기를 잘도 지어냈다. 때로는 세상의 대단한 이치를 깨달은 척했고, 때로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 우스운 꼴을 보는 인물을 만들어 조롱했다. 처참한 죽음과 황당한 죽음, 허무한 죽음을 만들어냈다.

 

죽음은 그냥 죽음인데.

1초잖아, 길어도.

 

한숨을 폭 쉬었다. 차가운 입김이 입술을 스쳐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 퍼졌다.

그중에 제일 웃긴 건 아름다운 죽음인데, 나는 이제까지 살면서 아름다운 죽음은 보지 못했다. 내가 적어도 이백만 년, 그 이상은 살았는데 말이다.

인간은 너무 쉽게 죽는다.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논쟁거리였다. 어떤 인간은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있겠냐”고 하고 어떤 인간은 “가는 거 금방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웃기다는 거다. 잠깐 숨돌리다 보면 돌아가시는 게 100년이 채 안 되는 인간 목숨 아닌가?

 

찰나를 살아가는 그들은 가끔 거슬릴 정도로 잘난 척을 한다. 마치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저들이 가진 듯이. 죽음이 인간이라는 종족들이 가진 대단한 재산이라도 되는 듯이, 어깨를 바짝 세우고 다들 한마디씩 하고 싶어 한다. 『우리』의 영생을 동경하면서.

 

“지민.”

“어, 마리아.”

“뭐 하고 있어? 책?”

 

지민은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반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유언집.”

“그렇게 부르지 좀 마.”

“사실이잖아. 어떤 인간은 평생 이 대단한 책만 쓰다가 죽는다니까?”

“그들에겐 숭고한 작업이야, 지민. 이곳에서 글을 쓰려면 때론 목숨도 걸어야 하니까.”

“...좋겠네, 인간을 잘 이해해서.”

 

명백히 빈정대는 말투에, 지민의 약혼자인 마리아는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는 지민은, 대체 어떤 이해를 위해서 계속 여기에 있는 거야?”

“뭐가?”

“이 땅에 인간들이 아직 뱀파이어의 존재도 모르고, 당연히 관련된 법도 없으니 사냥이나 하자고 왔던 거잖아.”

“어, 뭐....”

“아무리 길고 지루한 삶이라지만 아무 데서나, 아무거나 하면서 낭비하고 싶은 건 아니야.”

“너도 나름 즐기고 있잖아.”

“어제까진 그랬는데, 오늘은 너무 지루하다. 귀국할 날짜 잡아. 돌아가면 준비할 게 산더미야.”

“무슨 준비?”

 

마리아가 고결한 눈을 치켜뜨며 지민을 봤다

 

“결혼 준비.”

“아. 잊은 게 아니야, 네가 워낙 공사다망하니까...”

“공사다망은 무슨. 조선인이 다 됐네? 난 국제결혼은 생각 없는데.”

“....내 나라는 루마니아야.”

“그래, 뱀파이어의 땅 루마니아에서 만이천 년을 살았으니까. 하지만 인간의 안광을 가진 너에게 푸른 눈에 반려자는 필요하잖아, 맞지?”

“난 네가 필요할 뿐이야.”

“내 가문의 역사, 조금 더 순혈에 가까운 피, 당신의 아이를 잉태할 몸도 필요하지. 안 그래?”

“마리아.”

 

마리아가 지민의 어깨에 팔을 감싸며 안아왔다. 지민은 그저, 마리아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만이천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 지민? 나는 고작 오백 년 밖에 못 살았잖아. 당신의 역사가 그 유언집보다 대단하다는 걸 알아. 서로를 죽이는 것만이 법이었던, 그 무법의 시대도 살아나왔잖아. 더욱이 그 눈동자 색으로 말이죠.”

“운이 좋았을 뿐이야.”

“겸손이어야 해요, 곧 나의 반려자가 될 분. 나갔다 올게요.”

 

마리아가 지민을 떠나 까치발을 하고 총총총 문가로 걸어갔다.

 

“또 그 독서모임에 가는 거야?”

“네.”

“좀 잔인하다고 생각 안 해? 그들은 필사적이야, 별 볼 일 없는 제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로 목숨도 내놓았어.”

“내버려 둬요, 나도 뭔가 재밌는 일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차라리 목이라도 물어. 고귀한 숙녀가 스파이 노릇이나 할 게 아니라.”

 

옷과 머리를 매만지던 마리아가 지민을 돌아봤다.

 

“지민. 곧 쇼타임이예요. 당신과 내가 떠나는 날, 그들이 우리 모임을 덮치기로 했으니까.”

“그러니까 빨리 앞당겨 주세요, 그 재밌는 구경을.”

“조선에서 꼭 읽고 싶은 유언집이... 책이 있어서 그래. 좀처럼 구해지지 않아서.”

 

순간 서글서글한 눈으로 웃던 마리아가 눈빛을 달리했다.

 

“벌레도 그들만의 세계에선 규칙이 있어. 또 알아? 걔들 중 누군가는 책을 쓸지. 그건 뭐라고 부를 거야, 지민?”

 

지민은 저도 모르게 마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피곤했다. 흡혈을 하는 족속들은 손가락만 까딱하면 인간을 죽일 수 있으면서도, 그게 지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흥미롭게 죽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법을 피해,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상상도 못 한 방법으로. 서로 누가 더 참신하게 죽였는지를 겨뤘다. 그들에게, 아니 『우리』에게 인간은, 가장 밑바닥의 존재였다. 가장 찬란한 유희를 주는 게임이었다.

 

“다녀올게요, 지민. 온 한성에 벌레가 끓는다고 해서.”

 

지민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부추기지도 않았다. 뱀파이어가 인간을 죽이는 것은, 순리다.

 

“아무 일도.”

 

마리아가 서 있던 자리를 향해 지미이 한숨을 뱉듯 말했다.

 

“정말 미쳐버릴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어, 마리아. 만이천 년 동안.”

 

이유 모를 눈물 한 방울만이 볼을 타고 달렸다.

 

 

 

 

 

 

 

 

 

 

 

 

“푸른 머리의 사내라면, 내 잘 알지요.”

 

너무 쉽게 돌아온 대답에 정국은 남자의 입술을 멍하게 쳐다봤다. 늘 여기저기 다니며 기본으로 하는 질문이 ‘푸른 머리를 가진 남자를 보았느냐’였지만, 그렇노라 대답하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정말...입니까?”

“어디라고 거짓을 말하겠소. 지체 높은 댁의 귀한 손님이지 않소.”

“지체 높은?”

“백씨댁 말이오. 나마니아(羅馬尼亞)에서 온 손님이라지.”

 

정국이 담담하게 말하는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시오?”

“아니...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서.”

“아 확실히 그분을 보고 있자면, 꿈인가 생시인가 싶긴 하지. 밀가루처럼 흰 피부에 석류처럼 빨간 입술을 해서, 퍼런색 머리까지. 아무리 미리견이니, 아라서니, 덕국이니 온갖 사람들이 조선에 흘러들어왔다지만 완전히 차원이 다른 요란벅적함이더이다.”

“아. 그렇죠. 그럴 수 있어... 표현이 참 재밌으십니다.”

“근데 제일 신기한 게, 그분은 눈동자가 까맣다는 말이지. 마치 조선인처럼.”

 

눈동자. 정국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그날의 잔상이 떠올랐다. 만월에 비춰 보이던 노란빛의 눈. 정국은 기운이 한풀 꺾여 말했다.

 

“내가 아는 자가 아닐 수도 있겠군요. 언제부터 드나드는 걸 봤습니까?”

“글쎄, 한 두어 달 전?”

“꽤 됐단 소린데.”

 

정국의 풍채를 훑은 남자는 눈썹을 까딱이며 부러 더 싱거운 투로 말했다. 정국의 헤진 도포 끝단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이곳 사람이 아닌가 보오? 백씨댁도 모르고, 그 사내도 모르는 걸 보면.”

“멀지 않은 곳에서 사는데, 멀리 돌아서 와버린 참입니다.”

“돌아왔다고? 길을 잘못 들었나 봅니다?”

“네. 한참 잘못 들었습니다. 아홉 해를 돌아 도착했으니.”

“아홉 해?! 참, 길 한 번 오지게 잘못 드셨네요.”

“그렇게 한심한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어디 모자란 사람은 아니니.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됩니까? 그 백씨댁.”

“저어 앞에 모퉁이만 돌면 그 댁 대궐 같은 대문이 나올 거요.”

“감사합니다.”

 

씩씩하게 인사하며 돌아서는 정국에, 남자는 괜한 참견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타지에서 막 오셨으면 알아두시는 게 좋을 거요. 너무 밤늦게 나다니지는 마시오. 요즘 귀신인지 뭔지, 뭐가 나와도 나오는 모양이니. 근래 일대가 흉흉하고 사람이 죽어 나갑니다.”

 

정국이 멈춰 서서 남자를 돌아봤다. 어린 눈을 한 정국의 안광이 번쩍 빛나는 것을 남자는 얼핏 보고야 말았다.

 

“그 귀신, 나마니아인이 온 이후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네?”

 

시끌벅적한 큰길에서, 저 혼자 중얼거리듯 한 말이 들리지 않아 남자는 상체를 앞으로 쭉 빼고 정국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했소?”

“그쪽이야말로 안전하시라고.”

 

갓 끝단을 끌어다 고개를 숙인 정국이 그대로 시원스럽게 걸어나갔고, 이내 모퉁이를 돌아 남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누구세요?”

 

늦은 밤, 지민을 찾아왔다는 손님은 대뜸 그렇게 질문했다.

 

“....그러는 당신은.”

 

지민이 무심한 표정으로 여인을 내려다봤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한참을 무슨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꾸물거리던 여인은 결국 제풀에 입을 열었다.

 

“당신이 지민이라는 사람 맞습니까?”

“그런데.”

“나를 고쳐주시오.”

“고쳐? 그게 무슨...”

“웬 여인에게 목을 물렸는데...”

“목...”

“네, 잠깐만 아프면 금이며 옥이며 다 준다고 해서. 이, 일단 알겠다고 했는데, 돌연 제 목을 물지 뭡니까. 금을 받긴 받았는데... 그 이후로 자꾸 이상합니다.”

 

여인이 발작적으로 온몸을 긁어대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여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나도 누군가의 목을 물고 싶어져요. 지나가는 모든 사람의 목만 눈에 보이고, 그 속에 뛰는 맥박과 혈관이 머릿속에 그려진단 말입니다.”

“...언제부터.”

“목을 물린 건 그제 밤, 어제는 괜찮더니 오늘 아침부터 이럽니다. 방금은 자고 있던 내 동생을 물게 될 것 같아 도망쳐 나오는 길이예요. 내가 왜 이러는 건지 당신은 아시죠?”

“왜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하신 건지.”

“그 여인이 그랬습니다. 몸에 이상이 있으면 이곳에서 지민이라는 자를 찾으라고. 그자가 다 보상해줄 것이라고. 보상해주세요. 낫게 해주세요. 금도 다 돌려드리겠습니다.”

“보상이라는 말을 해석하는 방식이 틀렸소. 보상금을 달라면 드릴 수 있지만 그 증세를 낫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못 고치니까.”

“네? 무슨 말씀이세요... 내 말이 장난처럼 들립니까? 거짓이 아니라고요. 정말 물고 싶어요. 물고, 물어 뜯고, 빨고, 마시고, 뼈까지 씹어먹고 싶단 말입니다!!”

 

여인의 눈이 희번뜩하게 뒤집히더니 이성을 잃고 지민에게 달려들었다. 지민이 여인을 피해 담장으로, 담장에서 지붕으로 올라갔으나, 여인은 지민을 쫓아 날아들었다. 지붕과 지붕을 넘나들며 더는 여인이 아니게 된 마물은 지민을 향한 살의를 내뿜었다. 진정으로 잡아먹겠다는 의지였다.

가장 잔악한 방법이었다. 인간을 실컷 희롱하다 죽이기에 가장 알맞은 방법. 목을 무는 것이다. 흡혈을 하는 종족 중에서도 가장 미개한 마물이 되어 닥치는 대로 살생을 저지르다가, 다 타버린 초처럼 모든 생기를 잃고 죽는 것. 그것이 그녀의 운명이었다.

 

피를 원하고, 피를 마시지만, 절대로 뱀파이어가 될 수 없는 존재.

 

지민은 짧은 시간 내 결심을 굳혔다. 줄곧 이렇게 마무리해왔다. 마리아가 지민에게 거는 ‘장난’을. 지민은 수습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목적도.

 

지민이 여인의 머리통을 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유언은.”

 

아직 일말의 정신이 남은 건지, 여인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한가지 말만 내뱉고 있었다.

 

“죽여주시오. 죽여주시오... 제발...”

 

여인의 목을 잡아 들고 일어선 지민은, 그대로 목에 이를 박았다.

다음 순서는 피를 모조리 빨아 마시고, 여인을 뜯어먹는 것이었다. 제대로 사체를 수습하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민이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씨발. 존나 맛없네. 이것의 살점까지 먹어야 한다니 끔찍했다.

송곳니를 세워 한가득 베어 문 살점을 뜯어냈고, 삼켰다. 하.... 신음과도 같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앞으로 몇 번을 더...

 

“누이!!!”

 

정국이었다

피를 흘리는 사체를 보았다. 목을 한 번만 더 베어 물면, 달아날 목숨이었다. 인간이든, 뱀파이어든, 마물이든, 가장 치명적인 곳이 목이었으니까. 다시 살아나지만 않으면 된다. 저자가 사체를 잘만 수습해준다면.

 

“누이 어디 갔어!”

 

지민이 덜렁거리는 사체를 들고 담장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여인의 목소리를 물었다. 마지막 남은 숨과 함께 여인이 비명을 뱉어냈다. 찢어지는 고음을 들은 정국이 지민이 우뚝 서 있는 곳을 쳐다봤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동공이 흔들렸다. 지민은 정국이 서 있는 길목으로 착지하며 사체를 내던졌다. 여인의 몸뚱이가 낙엽처럼 뒹굴었다.

지민과 정국 사이로 찬 바람이 흘렀다. 달빛을 받은 정국의 큰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어디선가 좋은 냄새가 났다.

 

 

 

 

 

 

 

 

모퉁이만 돌면 있다더니, 정말로 돌자마자 파란 뒤통수가 둥실 떠올랐다. 정국은 당황스럽고 황당해서 그만 제 입술도 깨물었다. 피가 옅게 배어 나와 혀로 훔쳤다. 꼴사납게. 골목으로 꺾어지는 파란색을 좇아 급히 걸었다. 또 놓칠 수는 없었다.

하필 저잣거리의 초입이어서 앞에 방해물들이 너무 많았다. 골목 골목으로 휙휙, 그 복잡한 곳을 빠르게도 움직이는 것이 꼭 미꾸라지 같다.

 

“제발, 좀!”

 

해가 뉘엿뉘엿 지는 풍경을 뒤로, 정국은 미지의 존재를. 아니 미지의 살인마를 쫓고 있었다. 곧 어둠이었고, 오늘이 아니면 안 되었다.

 

ㅡ쿠웅

 

눈앞까지 가까워진 어깨를 잡아채서 그 위로 덮쳤다. 한없이 가벼운 이자를 무게로라도 눌러보고자 하였다. 또 하늘길로 달아나기 전에 말이다.

 

“나를 모를 리 없겠죠.”

 

코앞에 있는 남자의 눈동자를 쏘아 보았다. 확실히 그 눈이었다. 피를 머금었던 검불은 눈빛. 아니, 맑은 갈색의 눈동자.

 

“왜 이제야 오는지.”

“...뭐요?”

“덩치는 좀 커졌으나, 여전히 둔하네. 비켜.”

 

지민은 눈썹 하나 까딱 않았으며, 정국의 어깨를 밀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서, 준비했나?”

“뭐요?”

“은으로 된 칼 말이다.”

“...”

“칼 손잡이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으면 더 효력이 있다던데.”

 

정국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꺾어 지민을 쳐다봤다.

 

“태양이나 마늘 같은 건 이미 오천 년쯤 전에 다 적응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당신을 죽이러 왔냐는 말을 하는 겁니까?”

 

이번에는 눈썹을 한껏 치켜뜬 지민의 눈이 정국을 향했다.

 

“9년이다. 너도 뭔가는 준비했겠지.”

“글쎄요.”

 

정국이 앞으로 쏠렸던 몸을 뒤로 기울이며 태평하게 말했다.

 

“나마니아에 대해서 좀 알아내긴 했지요. 흡혈귀의 나라. 사시사철 안개가 끼고 비가 내려 빛이 들지 않는 나라. 나마니아에서 태어난 밤파이아라는 존재들은, 안전한 자신들의 조국을 두고 이 나라 저 나라에 흩어져 있다던데. 그 이유가, 지루함이 무서워서라고.”

 

정국이 지민 앞에 작은 칼을 꺼내 보이며 흔들흔들 약을 올렸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 은장도도 십자가도 아닌, 지루함이라지요.”

 

지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말도 있었습니다. 물론 좀 터무니없는 소문이긴 한데, 그 흡혈귀들이 사실은 인간의 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맛대가리도 없는 걸 살기 위해 억지로 먹어야 했고, 그래서 인간에 대한 분노가 더 쌓였다나.”

 

대답은 필요가 없었다. 지민의 표정이, 부답이, 모두 말해주었다.

 

“지난 9년간, 한 가지만 생각했습니다.”

“...”

“당신이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침묵이 흘렀다. 골목 너머의 소음도 점차 줄어갔다.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지민이 먼저 돌아섰다. 도망치듯 걸어가는 지민의 앞으로 정국의 말이 떨어졌다.

 

“당신이, 내 맛을 기억하고 있을까.”

 

멈춰선 지민은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한다.

 

“난 잊지 못했거든요. 내 피를 맛보고, 당신이 짖던 희열에 찬 표정을.”

 

정국은 은장도로 제 손목을 긋고는 지민에게 다가가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고통스러운지, 한쪽 눈을 찡그린 채였다.

 

“또 하나 궁금했던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내 누이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어떻습니까?”

“치워.”

 

지민이 어깨를 달달 떨었다.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아까부터 정국의 입술에서 얕게 나온 피의 향기에도 두 다리가 덜덜 떨리던 지민이었다. 정국이 헤매었던 아홉 해 만큼이나, 지민도 그의 피를 기다려왔다. 거지같이 매달려 그의 피를 탐하고 싶었다.

 

“다 마셔도 되는데.”

 

별것도 아닌 신호탄이 울리고, 이성의 끈은 끊어졌다. 정국에게 달려들어 손목을 붙잡고 미친 듯이 핥고, 빨아대기 시작했다. 그런 지민을 묘하게 흥분된 표정으로 지켜보던 정국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밤파이아 나으리, 저는 오늘 당신에게 격정적인 지루함을 선물하러 왔습니다.”

 

이내, 제 입술에도 칼집을 내고는 지민의 머리채를 잡아 피가 흥건한 입술을 물었다. 뜨거웠다. 지민은 다시 정국의 입술을 탐하였다. 입술을 맞물린 채로, 정국은 무엇인가 말하였다.

 

다음 순간, 정국이 은장도를 던져버리고 품에서 권총 하나를 꺼냈다.

제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그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잘 벼려진 칼날처럼, 아름다운 동작이었다.

 

맞물린 입술에서 쿨럭, 덩어리가 밀려 나왔다. 농도 짙은, 단 한 번의 만찬.

 

어느 바람에 실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디 단 냄새가 났다.

 

지민의 입안을 맴돌던 정국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내 피가, 달긴 다네.’

 

 

 

 

 

 

 

 

 

 

 

 

 

 

 

 

 

 

 

 

 

 

 

 

 

 

 

 

마리아,

 

당신은 유언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억겁의 시간 동안 수십 개의 유언을.

유언은 인간의 유물이지.

 

없었으면 좋겠는데.

 

한 인간의 인생에서 유언만큼 인상 깊은 문장은 다시 없거든.

그 모든 인상 깊은 순간들이, 죽지도 못하는 가슴에 비수를 꽂을 테니까.

그래도 살아가야만 할 테니까.

 

나에게는 지난 가을에, 무슨 일이 좀 있었어.

그래서 나는 떠나.

나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나는 떠나 마리아.

 

참고로 이것은, 유언이 아님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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