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거는 뭐예요?"
"귀…"
"그럼 이거는?"
"… 꼬리…"
정국은 눈앞에 펼쳐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잠시 아찔해졌다.
할로윈 밤에 생긴 일
: 삼미호 지민이의 일탈기
지민은 서울특별시 00구 00동 산 13에 사는 여우 요괴다. 그것도 일 이년 산 다른 요괴와 달리 자그마치 1300년이나 산 여우 요괴란 말이다. 여우 요괴 지민은 여우구슬을 만들어 세 개밖에 없는 꼬리를 아홉 개로 늘려 구미호가 되는 구미호 꿈나무였고, 최종적으로는 선도를 걸어 옥황상제를 모시고 하늘나라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는 그저 평범하지만 꿈 많은 영물이었다.
구미호는 본디 사람을 홀려 간을 빼먹는 요괴로 알려져 있으나 지민은 간이 뭐야, 간이나 내장 같은 음식은 비려 먹지도 못하고 굳이 고기를 먹겠다고 고르고 고른 것이 겨우 소고기였다. 그것도 몇 점 입에 대고 질렸다며 땡! 하고 입 싹 닫는 입마저 짧은 구미호. 내장도 안 먹어, 고기도 싫어해 그렇다면 이 산속 구미호는 뭘 먹냐 하면 산에 나는 풀을 뜯어 아침, 점심, 저녁 질리지도 않는지 삼시 세끼를 풀로 챙겨 먹는 채식 구미호, 아니 삼미호였다. 그런 삼미호 지민은 오늘도 꼬리 세 개를 살랑거리며 와이파이가 터지는 작은 집에서 아침에 호석이 까놓은 사과를 먹으며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다.
먼 과거에는 지민의 꼬리를 사랑해주는 어린아이들과 이 산 저 산 뛰어다니며 놀기도 했고, 마을 사람들과 한데 어우러져 봄에서 겨울까지 사계절이 무사히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의 따뜻하고 행복한 기운을 잔뜩 모아 여우구슬을 만들면 좋은 기운을 받아 만들어진 그 여우구슬은 오색으로 빛이 났고 아름다웠다. 여우구슬은 많으면 많을수록 영력이 올라가 신선이 되는 길에 오르기가 쉬워지는데, 그러기 위해선 먼저 꼬리가 아홉 개가 달려 있어야 했다. 꼬리는 여우구슬 당 하나, 지민은 여우구슬을 만들어 옥황상제가 하사하는 꼬리와 바꿔 생활하는 그냥 그런 평범한 여우 요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여우가 사람을 홀리더니 간을 빼먹는다는 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민을 찾던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그뿐이었으면 좋으련만 개중에는 지민의 집을 홀라당 태워먹으며 마을에서 나가라는 소동까지 벌어져 마을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잔뜩 쳐진 세 개뿐인 꼬리를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몇 년, 그러다 흥 많은 도깨비 호석에게 거둬져 생활하는 중이었다.
지민은 원래부터 심성이 착했다. 좋게 말해서 착한 거지, 세상 물정을 몰랐고 겁까지 많아 자신의 집을 불태우고 돌을 던지며 나가라고 한 인간들을 괘씸해하기는커녕 그런 인간들이 무서워 집에 콕 틀어박혀 여우구슬도 못 만들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꿈을 버리지 않고 언젠가는 자신이 멋진 '구미호'가 될 거라는 거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요괴였다. 그 자부심 때문에 1300년씩이나 살아놓고 꼬리와 귀를 숨겨야 되는 이유를 몰라 배우지 않았고, 소복 좀 그만 입으라며 호석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삼미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며 소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러면 겁이라도 없을 것이지 지민은 인간들이 무서워 여우구슬은커녕 호석이 장을 보러 인간들이 사는 곳까지 내려가는 일도 흉내 내지 못했고, 따라가기도 꺼려했다.
"하이고… 지민아, 인제 일어나서 사과 먹냐~"
언제 문이 열렸는지 현관문이 열리며 들어온 호석의 양손에는 마트에서 파는 초록색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부스스한 머리로 사과를 먹고 있는 지민을 보면서 한숨을 푹- 쉬는데 지민은 그런 호석의 반응이 늘 있는 일이어서인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맛있게 집어먹었다. 저렇게 한숨을 쉬고 나면 꼭 밖에 좀 나가보라는 잔소리가 딸려 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말고 밖에 좀 나가봐라~"
저거 봐, 저거. 또 시작이야. 지겹다는 듯이 호석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사과를 아삭아삭 잘도 베어 무는데, 오늘은 날이라도 제대로 잡았는지 그런 지민의 앞에 털썩 앉아서는 설득하기 시작했다.
"지민아, 꼬리 아홉 개 만들어야지."
"치. 누군 안 만들고 싶나…"
"네가 밖에 나가서 사람들이랑 놀아야지 여우구슬도 만들고! 만든 여우구슬 팔아서 꼬리도 사고 그러지!"
"여우구슬은 파는 거 아니거든!"
“그래, 알지! 여우구슬 파는 게 아니라 공양하는 거, 잘 알지.”
새초롬하게 째려보는 지민에 호석은 두 손바닥으로 내저으며 그래그래! 미안해! 하고 사과했다. 지민도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혼자 있는 것보다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좋았고, 그래서 마을에서 쫓겨났을 때에는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언제까지고 이 산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고, 또 얼른 꼬리를 아홉 개 만들어서 옥황상제도 모시러 가야 되고…
하지만…
마지막 남은 사과를 멀뚱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지민을 보던 호석은 지민의 등을 쓱쓱 쓸어주며 말했다.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 내려갔다가 또 돌팔매질을 당할 까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이 예전 같지가 않아. 간 빼먹는 요괴? 그거 다 옛날 얘기다?"
"……."
"지민이, 일단 이거 입에 넣고. 고렇지, 잘 먹네."
한참을 그렇게 떠들었을까. 아이고, 형은 학원 나가봐야 될 시간이다. 잘 생각해봐. 알았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던 호석이 문을 열기 전 지민을 쳐다보고 달래듯이 말했다.
- 달칵.
그것이 현관문 앞에서 한 호석의 마지막 말이었다.
천 년도 더 들은 호석의 말이었지만,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커다란 바위처럼 동굴을 꽉 막고 꼼짝없이 움직이지 않던 지민의 마음속 바위가 움직였다. 입안에 있던 사과를 꼭꼭 씹어 삼키고 사방팔방으로 뻗어있는 머리카락도 빗으로 차분하게 정리도 하고, 소복뿐인 옷장이지만 새 옷을 꺼내 입으며 지민 나름대로의 단장을 시작했다. 고작 세 개뿐이지만 백색의 윤기가 흐르는 꼬리까지도 빗질을 해줬다. 산을 탈 때만 신던 신도 꺼내 신으니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제법 오랜만의 외출 같은 일탈이 시작되었다.
*
지민에게 바깥세상은 1000년 전에 멈춰있었다. 그동안 밖을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민의 집은 산 13에 위치해 있었고 사람을 보면 횃불을 들고 쫓아오던 마을 사람들이 생각나 사람과 연을 끊은지도 1000년이나 되었다. 오랜만에 산을 내려와보니 검은색으로 칠해져있는 도로 위에는 쌩쌩 내달리는 차들이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저게 대체 뭐야…? 그런 의문이 들기도 전에, 어떤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자신을 휙휙 지나쳐가는 것을 보며 어쩌면 호석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정말 사람들이 예전 같지가 않구나.
심지어 아무도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예전과 달라졌다지만 귀와 꼬리를 보는 인식은 줄어들지 않았으니 제발 감추는 법을 배우자고 사정사정을 했었는데, 호석이 걱정하는 것보다 인간들은 개방적인 것 같았다. 벌써 눈이 마주친 인간들이 여럿 되는 것 같은데 다들 마주치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엄지를 들어 올리거나 환하게 웃는 일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뿔을 달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처럼 소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
오늘은 10월 30일, 할로윈 데이 하루 전 금요일이었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거뭇해진 하늘 아래에 빛이 나는 주황색의 호박이 주렁주렁 모두 눈 코 입이 뚫려 집에 달려있었다. 사람들의 복장도 많이 달라졌다. 삼지창을 들고 몸에 쫙 달라붙는 가죽 옷을 입은 사람, 호석이 형처럼 머리에 작고 큰 뿔이 달려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뿔을 보고 자신과 같은 요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사이사이에 껴 있는 요괴들이라니... 심지어 한국 토종 귀신이 아니고 외국에서 왔는지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귀신들도 더러 보였다. 지민은 두리번거리면서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갔다.
할로윈 이브 날은 할로윈에 비해 인파가 그나마 적었다. 하지만 천 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지민이 그런 것을 알리가 만무했다. 사람들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사람들이 멈추면 멈추는 대로 그렇게 지민은 앞을 걷는 귀신을 따라 움직였다. 이것이 지민이 걸어가는 건지 아니면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귀신들이 안내해주는 대로 따라가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오랜만의 나들이에 그마저도 기분이 좋아 입꼬리가 계속해서 올라갔다. 저 귀신 옷 예쁘네.
사람들로 꽉꽉 막힌 거리에 지민은 두 손으로 주먹을 꼭 쥔 채 가슴에 맞대고 사람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러던 중 한때 친하게 지내던 처녀귀신도 마주쳤는데 처녀귀신은 그동안 나이가 먹지도 않았는지 여전한 머리카락에 얼굴이 종잇장처럼 새하얬다. 반가운 마음에 움직이지 않는 팔을 품에서 꺼내 흔들며 인사를 했지만 오랫동안 만나지 않아 지민의 얼굴을 까먹었는지 쌩하고 지나가 속상하기도 했다. 어깨가 축 처지는 것도 잠시, 아까부터 꼬리가 사람들의 발에 치이고 또 뒤에서 자꾸 꼬리에 재채기를 하는 것이 꽤 불쾌해 꼬리를 품 안에 안고 가던 중 누군가가 지민의 어깨를 톡톡 쳤다.
"구미호예요?"
"… 응?"
거리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 때문에 뭐라고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그런 것보다 지민의 시선을 끈 건
"잘 안 들리나? 형!!! 구미호!!!예요???"
커다란 토끼…였다.
토끼? 이렇게 커다란?
복슬복슬해 보이는 회색과 하얀색이 섞인 토끼는 배가 남산만 하게 볼록 튀어나왔고 노란색의 커다란 리본을 하고 있었다. 또 배불뚝이같이 빵빵한 배 위에는 당근 모양의 가방이 달려 있었고 무엇보다 그 토끼는 지민이 올려봐야 할 만큼 컸다. 불과 며칠 전, 산에서 본 산토끼도 이렇게까지 크지는 않았는데 대체 그동안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까지 수많은 귀신들을 보며 놀란 건 놀란 것도 아닌지 입이 떡 벌어져서 커다란 토끼를 쳐다보던 지민은 '형?'하고 물어오는 토끼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작게 도리질 쳤다. 그러자 눈을 크게 뜨며 '구미호 아니에요?'라고 입모양으로 말하다가 이내 됐다는 듯 웃어 보이며 같이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어오는 토끼. 이에 대한 답도 역시 고개로 끄덕끄덕.
사진 찍어도 되냐면서 웃어 보이는 토끼에 무슨 의미인지 몰라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토끼는 하얀색 소복으로 덮어져 있는 지민의 손목을 붙잡고 사람이 덜 있는 골목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토끼가 이끄는 대로 손을 붙잡고 수많은 인파 속을 나와 조금은 한적한 길가에 선 지민은 인파에 섞이는 바람에 제대로 펴보지도 못했던 허리와 꽁꽁 안고 있던 꼬리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쫑긋거리는 지민의 귀와 살랑이는 꼬리를 보며 토끼는 연신 '대박'을 외쳤다.
"진짜 구미호 아니에요? 꼬리도 있고, 구미호 같은데."
"으음… 구미호는 아니고 삼미호…인데."
"삼미호?"
"으응…"
"꼬리가 세 개라는 건가? 어? 그러네?"
"……."
"구미호는 꼬리가 아홉 개 아니에요? 왜 세 개예요?"
천진난만하게 물어오는 토끼. 난생처음 보는 크기의 토끼에게 자신의 꼬리가 모자란 이유를 설명하려니 몰려오는 민망함에 꼬리가 지민의 뒤에서 살랑거렸다. 구미호가 될 여우치고 지민은 인간들이 사는 곳에 오래 있는 격이었다. 그것이 자그마치 1300년이나. 이미 자신과 동기인 구미호들은 능력이 출중해 옛적에 도를 닦고 사람들과 어울려 여우구슬을 꼬리와 바꿔 하늘로 올라간지 오랜데, 지민은 구미호의 프라이드를 지키겠다며 귀도 숨기지 않고 꼬리도 숨기지 않으며 하다못해 인간과도 잘 지내야 될 텐데 인간이 무서워 밖을 나가지 않으니 여우구슬은 늘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었다. 심지어 이 꼬리도 한창 인간들과 놀던 때에 만들어 놓은 구슬로 겨우겨우 만든 세 개였다.
부끄러운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지민이 정국에게 대답을 해 주는 것은 오랜만에 호석이 아닌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지민은 입술을 앙, 깨물면서 마지막으로 대답을 해줬다. 여우구슬을 만들어서 옥황상제님께 올라가 꼬리로 교환을 해야 되는데 여우구슬을 한동안 못 만들어서 꼬리가 세 개인 삼미호라고.
"여우구슬은 어떻게 만드는 건데요?"
"행복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기운으로 만드는 거야. 그 기운으로 구슬을 만들 수 있는 건 여우만 가능한데, 여우 중에도 구미호가 될 수 있는 여우만 만들 수 있어."
"에이… 그래도 옥황상제가 꼬리 주는 건 너무했다."
"아냐아~ 여우구슬이 오색으로 빛나는 것이 워낙에 예뻐 상제님이 좋아하시거든. 나는 여우구슬을 드리고, 상제님은 감사의 의미로 꼬리를 주시는 거지."
자신이 얘기하는 것을 흥미롭게 눈을 반짝이며 들어주는 토끼의 반응에 신이 난 지민은 주저리주저리 떠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꼬리 얘기나 여우구슬 얘기는 누구도 궁금해하지도, 물어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 신이 난 거일 수도 있다. 입술을 움직이며 얘기하는 지민을 가만히 보던 토끼는 앞니가 뿅, 하고 튀어나오더니 으흐 하학하고 웃기 시작했다. 지민이 말 수도 적어서 원래 대화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가 했는데 어째 자신보다 말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갑자기 귓가에 꽂히는 토끼의 웃음소리에 지민의 귀가 쫑긋했다.
"형, 진짜 대단하다!"
"……???"
"캐릭터 되게 구체적으로 잡았네요? 저는 그냥 인형 옷 입고 돌아다니만 하는데."
토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지민은 난감했다. 분명 무슨 말인지 말소리는 귀에는 들렸지만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건데? 미간을 찌푸려가며 한참을 고민하던 지민은 곧 여우구슬을 만드는 것이 대단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뿌듯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우구슬 만드는 거 그거 쉬운 일 아니지. 아무 여우나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뿌듯해서 발그레하게 웃고 있는 지민을 보니 정국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것 같았다.
"형은 이름이 뭐예요? 저는 정국인데…"
"……."
"아, 근데 형 맞나? 저는 21살인데, 형은 몇 살이에요?"
"어… 박지민."
폭풍처럼 몰아쳐오는 정국의 질문에 지민은 먼저 박지민이라고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박지민이라는 이름 석 자가 입에서 뱉어지니 속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몇 년 만에 호석이 아닌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것일까? 이름을 알려주고 곧바로 23살이라고 대답했다. 밖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나갈 지민이기에 호석이 늘 세뇌시켜 놓았던 답안이었다.
'누가 물어보면 스물세 살이요. 라고 대답해. 알겠지? 허유… 지민이 너는 좀 애가 어려 보이긴 하는데… 그래도 딱 그 나이가 적당한 것 같다.'
지민의 대답에 형이 아니면 어떡하지 고민했다면서 또다시 웃는 앞의 토끼, 아니 정국에 지민도 별것도 아니었지만 같이 웃었다. 웃음이 많은 정국은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도 여우를 기분 좋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지민의 어깨너머에서 살랑이는 꼬리를 보고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정국을 보면 여우 또한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
정국은 꽤나 수다스러웠다. 얼마나 수다스러웠냐면 짧은 시간 안에 정국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정국과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건 이 근처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고, 축제 때문에 친구들이랑 놀러 왔다는 것과 정국은 토끼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교수님들이 내주는 과제가 너무 많다느니, 이번에 교외활동을 하면서 맡은 게 너무 많다느니 가만히 들어주는 지민에게 한탄 아닌 한탄을 하며 길을 걸었다. 자신의 한탄도 고개를 끄덕여주며 가만히 들어주는 지민 덕분에 하지 않으려던 말도 술술 나왔다. 그 말들 중 지민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겨우 반틈이었지만 매일 집에서 호석과 '밥 먹어', '응.'같은 내용의 대화가 아닌 누군가를 알아가는,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것 같아 행복했다.
원래 이런 곳에서는 사진을 찍어야 된다며 정국과 만나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혹시 휴대폰 없냐는 정국의 말에 지민은 요즘 다 갖고 다니는 거라며 자랑하던 호석이 떠올랐다. 그때 나도 하나 사주냐고 물어봤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사달라고 하는 건데… 자신의 말에 지민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자 그 모습을 본 정국이 오히려 당황해하며 자기 것으로 먼저 찍고 휴대폰 번호 알려주면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번호가 없다고요? 형, 휴대폰이 없다는 거예요?"
"으응…"
"… 연락은 어떻게 해요?"
"음, 편지 쓰면 되지 않을까…?"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말을 늘리는 지민을 보고 머뭇거리던 정국이 질문을 했는데 엉뚱한 답변이 돌아왔다. 연락을 어떻게 하냐니까 편지라니, 이게 무슨 엉뚱한 답변이야. 지민은 나름 괜찮은 답변이라고 생각했는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정국에게 해사하게 긍정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눈앞에 있는 이 형은 자신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달랐다. 할로윈이라고 꾸민 하얀색 귀와 꼬리도 지민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고 부끄럽다면서 작은 손으로 소매를 잡고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도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랐다. 소매를 보니 아까 골목으로 데려오며 잡았던 얇고 가는 손목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맞잡았던 손을 쥐었다 폈다 해봤다. 괜히 아무것도 안 쥐여진 손이 어색했다.
자신이 알고 지낸 형들과 달라 별로였냐고? 아니, 너무 귀여워서. 야하게 생겨서는 귀여운 행동을 하는 그런 것이 너무 자신의 취향이라서. 웃음이 비죽 튀어나올 것 같아 정국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며 주먹을 입가에 갖다 대었다.
먼저 같이 놀지 않겠냐고 제안한 사람은 정국이었다. 사진을 찍고 통성명을 하고 나니 두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장난치던 지민은 정국과 헤어질 준비를 했고 지민의 그 모습이 괜히 정국을 조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인간을 좋아하던 지민이 함께 놀지 않겠냐는 정국의 제안에 거절할 리가 없었고 오히려 떠나갈 듯이 기뻐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정국과의 대화는 예전 어린아이들과 웃고 떠들던 것을 떠올리게 해줄 만큼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천 년 동안 인간들과 담을 쌓고 산 벽의 높이가 알게 모르게 조금 높았는데 그 높다란 벽을 정국은 지민이 놀라지 않게끔 천천히 허물어주고 있어 오랜만에 나온 인간들의 마을에 적응하기가 좀 더 수월했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 왔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곳곳에서 정국의 친구들을 볼 수 있었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튀어난 손이 정국이를 툭, 치면 정국과 걸어가던 지민은 꼬리가 쭈뼛 설정도로 깜짝 놀랐는데 오히려 당사자인 정국은 그 팔을 쥐며 대수롭지 않게 대했다. 또 계단에서는 얼굴이 하얀 귀신이 나타나 같은 요괴인 지민은 저도 모르게 정국의 팔뚝을 잡기도 했다. 지민은 두 손을 심장 부근에 톡톡 가져다 댔다. 혹시라도 간이 떨어지지는 않았을지, 심장은 무사한지 보기 위해서였다. 1300년 삼미호 귀생에 이렇게 놀랐던 적이 있었을까… 놀랄 때마다 정국은 지민을 제 쪽으로 끌어안으며 그만 좀 놀래키라고 때리는 시늉을 하며 주먹을 들어보이기도 했다. 한참을 돌아다닌 뒤에는 친구들이 술을 마시자고 정국을 찾는 통에 정국이 먼저 양해를 구했다.
"애들이 이 근처에 있대요. 형 술 좋아해요?"
"응? 나 술 좋아하지~"
지민의 취향대로만 말을 하는 정국. 술이라면 한량처럼 떠돌 때부터 빼놓을 수 없는 애주가인 지민은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낯을 가리지만 정국이의 친구라면 정국이와 비슷하겠지. 뭐... 술만 먹으면 되잖아. 걷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틀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그리고 조금 걸어 알록달록한 블록으로 줄지어있는 바닥을 밟고 그 사이에 있는 주황색 천막으로 만들어진 술집으로 들어갔다. 외관으로 보기에는 허름한 술집이었지만 천막을 거두고 안으로 들어가니 깔끔한 내부가 나타났다.
"야! 전정국!"
"어? 안녕하세요~"
"아까 그 형이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들어가자마자 한쪽 구석에서 웅성이는 무리를 쳐다보니 다 지민보다 키는 한 뼘씩 커 보였다. 지민은 괜히 기가 죽어 목만 까딱이며 목례를 하고 의자에 앉았고 서 있던 정국도 그제서야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사이사이에는 아까 만났던 얼굴이 하얀 귀신도 팔이 덜렁거리던 귀신도 앉아있었다. 와중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마주쳤다고 아까는 무섭기만 했던 귀신들이 반갑기까지 했다. 술잔 두 개만 더 달라고 주문을 하고 지민이 앉은 자리 앞에는 술잔이 놓였다.
매일 집에서 호석이가 사 온 소주를 혼자 홀짝이던 지민은 어느새 정국과 동떨어져 정국의 친구들과 어깨동무까지 해 가며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 두 잔 잔이 비워나갈수록 조용하고 얌전했던 지민은 온데간데없었다. 별로 웃기지 않은 얘기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를 내비쳤다. 정국의 친구가 구미호 형님 웃기다면서 테이블을 뻥뻥 소리 나게 때려대면 지민은 야! 나 삼미호거든? 네가 더 웃겨! 하고는 꺄르륵 거렸다.
"형, 형, 괜찮아요?"
옆에서 정국이 어깨를 작게 건드리며 물어왔다. 적당히 마셔요. 처음에는 취한 줄도 모르게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이제야 얼굴에 열이 오르는지 불그스름 해지기 시작했다. 더운 느낌에 손부채질을 하는 지민에게 차가운 손등을 가져다 대어줬다.
"시원하죠?"
"으응… 아… 시원하다~"
눈이 감기자 기다란 속눈썹이 눈 밑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오자 발그레 한 양 볼이 보였고 분홍빛이 돌며 솜털이 보이는 것이 꼭 복숭아, 그것도 지민이 그렇게 말하던 옥황상제가 따먹을법한 천도복숭아 같았다. 그리고 좀 더 밑으로 내려가니 두툼한 입술이...
정국은 파드득 떨며 지민의 볼에서 손등을 떼어냈다. 아까부터 지민은 자신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
즐거웠슴다 형님~! 제법 친해진 정국의 친구들과 손 흔들거리며 인사를 나누고 정국을 빼고 나머지 친구들은 집이 근처여서 곧장 집으로 갔다. 애들을 배웅하고 나니 남은 건 취기가 남아있는 지민과 정국이었다.
"형, 내일도 같이 놀래요?"
"내일?"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지민이 되물었다.
"네, 내일이 진짜 축제잖아요. 오늘은 이브."
"오늘처럼 노는 거야?"
혹시라도 지민이 싫다고 할까 봐 조급한 마음에 혀로 입술을 축였다. 네.
정국의 말이 끝나자마자 너무 좋아!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지민의 뒤에서 꼬리가 사정없이 살랑였다. 아까부터 꼬리가 살랑이는 걸 봐서 그런지 한 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같이 다니면서 꼬리 만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아 건조해진 입술에 침을 바르며 참았다. 생글 웃으며 그럼. 조심히 가고 내일 봐요. 하고 인사를 하는데 지민의 표정이 이상했다. '으음…' 곤란할 때 나오는 지민의 버릇이었다.
"왜요?"
"… 집을 어떻게 가더라."
집이 어디더라? 손가락으로 이곳저곳 가리키면서 몸을 트는 지민은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삐끗거리는 바람에 옆으로 엎어지려던 지민을 정국이 붙잡았다. 아까 술을 많이 마신다 싶더니 결국 이 모양이었다. 이다음 말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정국은 아무리 제 친구가 술에 꼴아 전봇대와 키스해도 미친놈을 취급받던지, 한 겨울에 바닥에 누워 자겠다고 진상을 떨면 입이 돌아가던지 상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저 모텔 잡았는데 같이 갈래요?"
"모텔?"
"아, 아니. 그러니까…"
"……."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은 정국에게는 정말 충동적인, 그런 말이었다.
"… 정말 잠만 자자고… 그러니까…"
"……."
"인원 추가하는데 만 원만 내면 되니까……."
"그래, 가자."
변명은 아니었다. 정말 잠만 자자는 뜻이었으니까. 불순한 의도는 없었지만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앙 다물고 올려다보는 지민과 마주치니 괜히 자신이 변명하는 것 같아 민망한 마음에 큼큼, 헛기침을 했다. 몇 블록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잡아놓은 모텔로 향했다. 모텔촌에는 수많은 모텔들이 몰려있었고, 화려한 조명들에 눈가가 피로했던 지민은 아까보다 어두워진 골목에 눈을 꾹꾹 누르며 정국을 따라갔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네온사인의 [국민 모텔]. 그리고 모텔 913호 방 안. 찬 바람이 부는 쌀쌀한 날씨였지만 두꺼운 토끼 인형 탈을 두껍게 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인형 탈 안에 입은 검은색 무지티는 이미 땀에 잔뜩 젖어있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국은 '형 먼저 씻어요.'하고 배려를 했지만 지민은 고개를 도리질 치며 먼저 씻으라고 말했다.
"그럼. 금방 씻고 나올게요."
배려를 하기는 했지만 땀 때문에 돌아다니는 내내 찝찝했던 정국은 냉큼 욕실로 들어갔다. 평소라면 가방에 있는 세면도구로 씻었겠지만 오늘은 모텔에 있는 바디워시로 씻고, 샴푸에 린스까지 하고 나왔다. 10분? 아니, 저 모든 걸 하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며 서둘러 욕실에서 나와 지민에게 씻으라고 말하려는데 어째 지민은 자신이 씻기 전과 후, 바뀐 것 하나 없이 침대에 앉아있었다.
"형, 안 씻어요?"
"씻어야지!"
"근데 꼬리 안 더워요?"
"응?"
"꼬리랑 귀 이제 벗어도 되는데…"
정국의 말에 지민은 '어?'하고 되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불편하지 않아요?'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꼬리랑 귀가 왜 불편해? 정국의 질문에 근본적인 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는 지민은 눈을 크게 뜨고 정국을 쳐다봤다. 지민이 가만히 앉아 정국을 쳐다보고 있으니 정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지민에게 다가왔다. 따뜻한 물로 씻었는지 정국이 다가오면 올수록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샤워가운 사이로 덜 닦인 물이 뚝뚝 떨어졌다. 꼴깍, 정국의 눈치를 보던 지민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침 삼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들렸을까? 하고 슬쩍 정국을 쳐다보는데 정국은 못 들었는지 두 손을 들어 지민의 머리 쪽으로 다가왔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악!!!"
"… 어?"
정국이 지민의 귀를 잡아당겼고, 913호에는 지민의 단말마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 아파…"
"……."
"정국…아? 정국아? 어어? 정국아!"
아, 그리고 정국은 기절하는 중이었다.
정국의 몸은 기울었고 모텔에는 '쿵.'하고 묵직한 소리가 났다.
*
눈을 감고 몇 초 뒤에 느껴지는 아픔에 저도 모르게 꼭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면서 소리를 백! 하고 질렀다. 귀를 소중하게 만져줘도 모자랄 판에 귀를 잡아뜯듯이 만지는 탓에 놀란 건 지민인데 쓰러지는 건 오히려 정국이었다. 갑자기 지민의 눈앞에서 종잇장 넘어가듯이 쓰러지는 정국에 당황한 지민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국아?"
뭐지? 무슨 일이지? 쓰러진 정국의 뺨을 처음에는 아프지 않게 때려봤지만 일어날 생각이 없어 아까보다 더 세게, 더 세게. 어깨를 흔들어도 보고 혹시 몰라 가슴에 볼을 갖다 붙이고 심장이 뛰는지도 확인했다. 심장은 다행히도 뛰는 것 같았다. 둥, 둥, 둥, 둥. 일정한 심장소리에 안도하고 볼을 뗐지만 글쎄… 이다음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입술을 물어뜯으며 주변을 살펴봤지만 지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떡해…"
침대 위에는 정국의 휴대폰이 있었지만 가만히 그 휴대폰을 들고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휴대폰을 어떻게 켜는지조차 모르는걸. 휴대폰을 켜는 법도 모르는 지민이 휴대폰을 켜고, 119버튼을 누르고 전화하는 방법까지 아는 건 무리였다. 그저 발을 동동 굴리면서 '정국아…' 앓는 소리를 내는 일 뿐이었다.
사람을 홀려 간을 빼먹는 악귀
문득 사람들이 말하던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어쩌면 사람들 사이에서 돌던 소문은 '진짜'였던 것이 아닐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국을 홀렸고 그래서 이렇게 쓰러진 것은 아닐까. 자신과 재미있게 얘기도 해주고 놀아주던 정국이 쓰러지자 처음에는 그 상황이 어리둥절해 당황하기를 수 분, 이제는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를 수 분하던 지민은 결국 눈에서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꼬리 끝에 매달려있기만 했던 투명한 눈물이 볼가를 타고 흘러내리자, 그것이 발화점이라도 된 것처럼 주체할 수없이 화수분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 정국아아…"
방 안에는 여우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여우가 이렇게 곡소리를 내는데도 아무도 안 알아주니 그 서러움이 배가 되는 것 같아 코를 먹어가며 열심히 훌쩍이는 지민은 간간이 손을 들어 정국의 어깨를 흔들어 깨워보지만 정국의 눈은 뜨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
영원히 깨지 않을 것 같았던 정국. 하지만 지민의 곡소리에 정국은 깬지 오래였다. 다만, 자신의 배 위에 엎어져서 본인이 무게를 실은 지도 모르고 엉엉 울고 있는 지민 때문에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을 뿐. 언제 기절한 건지 모르겠지만 정국은 눈 뜨자마자 축 처진 귀와 바닥에 널브러진 꼬리가 눈에 들어와 그대로 다시 기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만졌을 때 그 따뜻하고, 말캉한 뼈… 가 만져지던 귀의 촉감이 생각나는 것 같았다. 꿈같지만 꿈이 아니라니… 여전히 믿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지민은 어딘가 안쓰러워 보였다. 고개를 들지는 못했지만 움직여지지 않는 팔을 들어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
"형… 울지 말고…"
"… 딸꾹."
갑작스럽게 들리는 정국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딸꾹질을 하기 시작하는 지민. 정국의 가슴 쪽에 닿아있던 손도 꺽꺽거리며 움직이던 몸도 정국의 토닥임과 말 하나에
"… 일어나 봐요."
"……."
그 말에 또다시 쫑긋거리던 지민의 귀와 가슴 언저리에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적잖이 놀랐는지 코를 먹으며 딸꾹질을 해대는데, 고개를 들고 샤워가운만 빤히 쳐다볼 뿐 정국 쪽으로는 눈길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정국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퍽이나 좋은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꼬리가 하나둘씩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눈동자가 열심히 굴러가다가 정국의 몸에 붙어있던 손을 파드득 떼던 지민은 곧바로 정국 쪽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정국아.
"미안해…"
"……."
"… 많이 놀랐지?"
정국은 쓰러진 그 자리에 가만히 누워 지민을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보고 제가 구미호인 것이 무서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거라고 착각한 지민은 천천히 일어나서 방문으로 걸어갔다. 아까까지 이리저리 움직이던 꼬리는 마취 총에라도 쏘인 것 마냥 바닥을 질질 끌기 시작했고, '잘 있어.'라고 말하는 지민. 집 밖을 나와서부터 빈손이었어서 따로 챙길 건 없었다. 두 귀, 세 꼬리 모두 잘 붙어있으니 몸 만 이 밖에서 나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될 것이다. 왔던 길을 돌아가다 보면 어떻게든 집에 도착할 수 있겠지. 지민에게는 남는 것이 시간이었으니까 말이다.
"……."
"나 그래도 간 빼먹고, 그런 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누워있던 정국이 문고리를 잡는 지민을 보다 벌떡 일어나 문쪽으로 걸어갔다. 모텔이 좁아서 현관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얀 소복 끝자락을 잡았다.
"어디 가요? 갈 데 없다면서… 시간도 늦었는데…"
"… 집에 가면 돼."
"집에 가는 법 모른다면서요."
"… 으음…"
이 와중에 불리한 질문이 나오자 전부터 알던 습관이 튀어나오는 지민이 웃겼다.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 심사숙고해 대답을 고르는 지민. 덕분에 한참 동안 문을 열고 있었더니 밖의 찬 바람이 안으로 들어와 샤워가운만 입고 있던 정국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요."
"…"
문고리를 잡지 않은 지민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내일같이 파티하기로 했잖아요."
"……."
"들어가요."
"… 그래, 들어가자."
달칵, 문이 닫혔다.
*
지민의 손을 잡아끌고 침대에 앉히고 보니 백색의 귀며 꼬리며 잘 보였다.
"형, 그럼 구미호예요?"
"으음… 구미호는 아니고, 삼미호야…"
처음 지민과 시끌벅적한 거리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여우구슬을 만들지 못해 꼬리가 아직 세 개뿐이라는 내용의 대화가 말이다. 당연히 구미호에 대해 찾아본 적이 없으니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일 줄 알았다. 지어낸 이야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산증인이 침대 위에 앉아있다니.
"이거는 뭐예요?"
"귀…"
"그럼 이거는?"
"… 꼬리…"
"… 허…"
정국은 믿기지 않는 상황에 다시 기절하고 싶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토해내듯 내뱉는 숨 한마디에 지민은 어깨를 움츠리며 긴장을 했다. 미간을 지푸리는 모습을 보며 예전 자신의 집을 태우던 사람들이 떠올랐고, 그런 사람들의 모습과 정국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긴장해서 몸이 굳어진 채로 눈동자를 굴려가며 정국을 쳐다봤는데, 정국과 눈이 딱 마주쳤다. 황급히 눈을 피하며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제 소복을 쥐어짜듯이 잡았다.
"일단… 일단, 먼저 씻어요."
욕실을 가리키며 정국이 말하자 침대에 앉아있던 지민이 일어나 머뭇거리며 욕실로 발을 옮겼다. 일단은 지민이 욕실에 들어가 눈에 보이지 않아야지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질 것 같았다. 욕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들리자마자 정국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침대에 앉았다.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는 손바닥을 바라보니 아까 지민의 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부드러웠던 하얀색 털과 물렁거리던 뼈의 느낌이 말이다. 솔직히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 증거로 귀를 만지자마자 짧았지만 기절까지도 했고 방금 본인 입으로 확인을 하면서는 또다시 기절이 하고 싶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국이 알고 있던 구미호와 지민은 조금 거리가 멀었다. TV에 나오는 구미호는 눈도 무서웠고 날카로운 송곳니와 손톱으로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악귀였지만 방금까지 앞에 있던 지민은 글쎄... 사람 눈치를 저렇게 보는 것이 정말 악귀일까 싶었다. 사진 찍으면서 좋다고 함박웃음을 짓고, 자신의 친구들과 술잔을 부딪히며 마시고 놀던 지민은 한 번에 말해서 나쁜 사람, 아니 나쁜 요괴는 아닌 것 같았다.
- 달칵.
시원하게 내리던 물줄기 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아까 정국이 입었던 가운과 같은 가운을 주워 입고는 불투명한 욕실 문이 열리며 지민이 나왔다. 힐끗힐끗 정국의 눈치를 보던 지민은 슬그머니 걸어와 정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물기가 축축해 무거운 꼬리를 품 안에 안고 수건으로 톡톡 닦아내기 시작했다. 아직도 밖에서는 사람들이 노는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커다란 목소리가 뜨문뜨문 들려왔다. 지민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조용한 방 안에서 천장을 보고 누워있고, 바로 옆에는 지민이 앉아있다는 이 상황이 정국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다 닦아냈는지 수건을 한곳에 치워두고 정국에게 조용히 물었다. 정국아, 불 끌까?
그 말에 정국은 괜히 눈동자를 여러 번 깜빡이며 방 안의 조명, 까맣게 쳐진 암막 커튼, 벽지의 패턴과 같은 의미 없는 것들에 시선을 뒀다. 형 자면 불 꺼요.
불을 끈 지민이 침대 끝자락에 천천히 누웠고, 그런 모습을 의식하던 정국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시야가 까맣게 가려지자 옆에 지민이 있다는 것이 더욱 잘 느껴졌다. 아직 눈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여전히 까만 천장,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 침을 삼키면 그 소리가 옆에 지민에게도 들릴까 봐 삼키지도 못하고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고 있었다. 혹시 자기만 이렇게 두근거릴까 싶어서 이제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가지고 몸을 틀어 지민을 바라봤다. 뭐에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지… 괜히 지금까지 긴장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늘 바닥에서만 자던 지민은 침대 위에서 자니 신기했다. 잠자리가 위에 있는 것도 신기한데 밑에 뭐라도 깔려있는 것인지 폭신폭신한 것이 신기해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머리 위에서 '쿡'하는 소리가 들려 올려다봤더니 웃고 있는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형 뭐 해요?"
"아니… 이거 되게 푹신하다."
"침대예요. 삼미호라서 침대도 모르나?"
"침대… 아니, 침대 나도 알거든."
누굴 침대도 모르는 삼미호로 만들어. 삼미호 자존심을 건드리는 정국의 말에 톡 쏘는 대답을 남기고 뒷말을 중얼거리며 마주 보고 누웠던 고개를 돌려 등을 지고 누웠다. 모르면서. 여전히 침대를 꾹꾹 누른 다는 게 티가 나는 줄도 모르는 지민이 웃겼지만, 자존심 강한 지민이가 싫어할까 봐 입술을 꾹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던 침대가 잠잠해지고 방 안에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리자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정국의 눈동자가 몸과 함께 움직였다. 꼬리 때문인지 모로 누워있는 지민의 구부러진 등이 보였다. 그제서야 꼬리와 귀가 정국의 눈에 보다 더 자세하게 들어왔다. 이렇게 보면 영락없이 '진짜'인데 어떻게 가짜라고 생각했는지 의심스러웠다. 특히 귀만큼이나 부드러워 보이는 꼬리를 만져보고는 싶었지만 혹시라도 자고 있던 지민이 깰까 가만히 보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갈 것 같지 않은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하지만 정국의 몸은 가만히 잠든 지민 뒤로 한참 동안이나 뒤척이다 해가 떠오를 때쯤 잠이 들었다.
*
"형, 아무도 몰라요."
거리에서 실랑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정국과 지민이었다. 원래라면 정국이가 써야 되는 토끼 탈을 지민이 쓰고 둘이 같이 돌아다니는 바람에 우스꽝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지민이 토끼 탈 한 번만 빌려주면 안 되냐고 사정사정하는 바람에 빌려주기는 했다만 그 한 번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지. 토끼 탈을 써놓고도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지민이었다. 자고 일어나서 정국이에게 '할로윈 축제'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부터 저랬다. 인간이 귀신 분장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 지민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이렇게 꼬리와 귀를 드러내고 다니는 것도 다 그 날인 덕분이라는 것과 이 축제에 정말 귀신은 지민 자신뿐이라는 것이 무섭게 만든 듯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삼미호인 게 들킨다면?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선택한 것이 정국의 토끼 탈이었다.
정국이 옆에서 오늘 할로윈 축제라서 아무도 모른다고 설득해봐도 지민은 두 귀를 꼭 닫고 있었다. 이게 진짜 꼬린지 귀인 지도 모른다니까…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지민에 답답하다는 듯 주먹을 만들어 가슴을 콩콩 찍어봐도 지민은 혹시라도 정국이 토끼 탈을 채갈까 봐 두 손으로 탈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괘씸한 와중에 정국의 발아래에 있는 꼬리가 눈에 보였다. 확 저 꼬리를…
"악!"
"나 아니야!"
누군가가 자신의 꼬리를 콱, 쥐는 느낌에 지민이 소리 지르자 옆에 있던 정국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손을 들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꼬리를 만질 생각이었던 정국은 소리를 지르는 지민에게 다급하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지민의 엉덩이를 쳐다봤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빨간색 손이었다. 지민이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니 히히 거리며 웃고 있는 꼬마 스파이더맨이 있었다. 옆에 있던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죄송하다면서 달려왔지만, 꼬마 스파이더맨은 지민의 꼬리를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와, 이거 진짜 부드럽다!"
부드럽다는 말에 괜히 속에서 울컥하고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 정국은 손에 들고 있던 당근 인형으로 꼬마 스파이더맨의 머리를 콩 하고 때렸다. 나도 아직 못 만져 봤는데! 솜이 잔뜩 들어간 인형이어서 아프지도 않았고 또 아프지 않게 때리는 커다란 토끼에 꼬마 스파이더맨은 자신과 놀아주는 것으로 착각했는지 으헤헤 하고 웃었다. 당근 인형으로 아이의 머리를 꾸욱꾸욱 누르니까 아이가 까르륵 자지러지게 웃고 있는데 이번엔 정국의 옆구리 쪽에서 묵직함이 느껴졌다. 스파이더맨을 처리하니 이제는 꼬마 슈퍼맨이었다.
"우리 형 때리지 마!"
"형?"
"민준아! 형 그렇게 때리면 어떡해!"
아이의 엄마는 바빴다. 어린아이였지만 때리는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 알았기 때문에 스파이더맨을 신경 쓰던 어머니는 슈퍼맨 쪽으로 달려가 번쩍 들어 안았다. 엉덩이를 팡팡 때리며 '너 형을 때리면 어떡해!'하고는 바로 내려서 사과하게끔 만들었다.
"죄송함미다…"
"어? 괜찮아요. 인형 옷, 이거 꽤 두꺼워서…"
주먹을 만들어서 얼마나 두꺼운지 꾹꾹 인형 옷을 눌러보는 정국. 그러고는 배에 붙어있던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 쥐여줬다. 여전히 지민의 꼬리를 쥐고 있는 스파이더맨에게도 이제 그만 그 꼬리 좀 놓고 이리 와서 사탕을 받으라고 손짓을 했다. 그제서야 꼭 쥐고 있던 꼬리를 놓고 정국에게로 다가오는 아이. 지민은 아이가 들고 있던 꼬리를 품에 꼭 끌어안고 쓰다듬었다. 아이의 손아귀 힘이 꽤나 세서 아팠지만 너무 놀라 별말을 못 하고 있던 와중에 정국이 구해줬다. 그러고 나서 정국을 바라보니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당근 가방에 있는 사탕이 바닥이 날 정도로 탈탈탈 모-두 털리고 있는 중이었다. 입술 사이로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품에 한가득 껴안은 꼬리로 입을 가리고 있었는데, 살려달라는 듯이 눈썹을 팔자로 만들어 보이는 정국에 꾹 참고 있던 웃음이 터졌다. 정국 덕분에 삼미호인 것이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어제가 전야제라는 말이 맞았는지 한산했던 거리는 사람들로 금방 불어났다. 불어든 인파에서 즐겁게 놀다가도 그 인파 속에서 빠져나와 어제 만났던 정국의 친구들도 만났는데 이번엔 칵테일 바에 들어가 앉아있었고, 어제처럼 한 잔 받아마시기도 했다.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제와 다른 사람들과 정국의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고 지민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단호박으로 만든 파이도 먹어봤다. 밤이 늦어지고 한창 거리는 분장한 사람들로 가득 차 열기가 뜨거웠다. 이제는 할 것도 다 해 같이 분장한 사람들을 쳐다보며 거리를 활보하는 것 밖에 하는 일이 없었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지만 지민은 여우 요괴니까, 인간인 정국이 혹시라도 무서워할 수 있으니까 조심스러웠고 그저 옆에 붙어 있기만 했다. 아직도 기억 한구석에는 자신의 귀를 만지고 기절을 한 정국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왔다 갔다 하며 수십 번은 봤을 계단에서 숨도 고르고, 정국의 친구들에게도 마지막으로 인사도 하고, 정국과 지민은 처음 만났던 곳으로 함께 걸어갔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이리저리 흔들며 헤어질 준비를 하는 지민을 지긋이 쳐다보던 정국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형, 이거 제 번호예요."
"응?"
"형은 지금 휴대폰도 없고… 편지도 좋지만 목소리도 듣는 게 좋잖아요…? 그런데 휴대폰이 없으니까… 휴대폰…"
종이 쪼가리를 냅다 내밀며 정리되지 않고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말에 관자놀이를 긁던 손가락은 여러 개가 되어 아예 머리카락을 해집어 놓았다. 휴대폰이란 소리만 도대체 몇 번째인지 거리 안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이해하지 못한 지민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라고?"
"그러니까… 앞으로 자주 만나요."
"……."
"우리."
말을 뱉어놓고 부끄러운지 눈동자를 굴리며 치아를 보이는 정국과 정국의 말을 곱씹어 보던 지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
정국과 헤어지고 난 뒤 지민은 한참을 헤매다 지민을 찾으러 온 호석에 의해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삼미호의 작은 일탈이 끝이 났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밤이 지나도록 들어오지 않는 지민에 괜히 자신이 밖에 좀 나가보라는 말을 해서 영영 나가버린 줄 알고 있던 호석은 지민을 보자마자 발을 동동 구르며 꽉 껴안았다. 조금 더 말을 지어내자면 눈물을 찔끔, 훔치는 걸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때까지도 지민은 정국의 말을 곱씹으며 얼이 나가있는 상태였다.
- 집에 가게 되면 여기로 전화해줘요. 그럼 제가 매일매일 찾아갈게요.
호석은 혹시라도 우리 삼미호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머리부터 꼬리까지 구석구석 보는데, 지민은 그런 호석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지민의 어깨를 탈탈 털던 호석의 손을 잡아끌어 흔들면서 말했다.
"형, 나 휴대폰 사줘."
뜻밖의 부탁에 호석은 의아해했지만 전부터 사주고 싶었기도 해서 흔쾌히 끄덕였다. 무사히 돌아왔는데 그거 하나 해주지 못할까? 이번 주는 내리 바쁘니 오는 휴일에 사가지고 들어오겠다고 호석이 말하자 지민은 제법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는지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민은 휴대폰 별로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고 생각했던 호석은 며칠 뒤 왜 갑자기 지민이 휴대폰을 사달라고 말을 꺼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 집에 도착하자마자 집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지를 않나, 전화 거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지를 않나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호석이야 드디어 지민이가 세상과 타협하고 꼬리를 만들 생각을 한 줄 알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일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 웬 젊은 인간 남자가 산을 타고 있길래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산이야 원래 인간들이 자주 오갔고, 늙은 사람들 중 나이도 어린 젊은 남자애가 혼자 산을 타는 것이 신기했던 것뿐이었으니까. 집에 돌아오니 지민은 며칠 전 사준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뭐 마려운 구미호처럼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뭐 해?'라고 묻기도 전에 어디서 무슨 냄새를 맡은 건지 바닥에 있던 꼬리며 귀며 사정없이 움직이기 바빴다.
"정국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소파에서 펄쩍 뛰어내리고는 신발도 신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가는데 그 상황이 어이없기도 하고 기가 차 지민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호석의 눈에 비친 건 아까 그 젊은 인간 남자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지민의 모습이었다. 둘 사이는 개미 한 마리도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비좁았고, 지민이 얼마나 행복하게 웃는지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지민만큼이나 오래 산 한국 도깨비가 아니어도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지민은 길고 긴 천 년 끝에 새로운 여우구슬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