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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아이는 불완전하다. 

 


 여리고 불완전한 아이는 세계와 외부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어른을 꿈꾼다. 이 세계에서 어른이 되는 길은 단 한 방향뿐이다. 전통은 날씨조차 심술궂게 몸을 냉대하는 10 월 25일의 어둔 밤에 시작된다. 성인의 날 전야인 할로윈 밤에는 죽은 영혼들이 살아난다고 했 다. 영혼들은 친절하기도, 짓궂기도 하며 이들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7일이 존재한다. 18세가 되기 이전까지 세계의 아이들은 같은 가르침을 받아왔다. 

 

 


 '25 일 자정부터 할로윈 자정까지 딱 7 일이란다 . 7 일간 자정부터 한 시간 동안은 눈을 뜨면 안 돼 . 악령들은 각자의 매력적인 모습으로 너희 시각을 뒤집어 놓을 테니 , 알겠지 ? 혹시나 목소리 가 들려와도 . 눈을 꼭 감아야 해 . 어른이 , 성인이 되어야지 . 성인이 되어 다시 아이들을 지켜줄 지혜를 길러야지 .'

 

 

 


 지금 그 세계의 불완전한 아이 정국은 길 앞에 서있다. 

 

 

 


Hide n Seek

w. 봄제

 

 

 

 

 


 시간은 열한시 반을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정국은 꽤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 냈다. 우리 정국이가 벌써 할로윈 의식을 지낼 때가 왔네, 부모님은 그를 보며 눈가를 부드럽게 휘었다. 저녁식사도 평소보다 더 근사했다. 예전에는 식탁에 오를 생각을 않던 자그마한 디저트 까지도 그에게 진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주변 모든 이들의 축복과 선망 속에서, 정국은 벌써부 터 7일의 할로윈을 거뜬히 넘긴 기분이 들었다. 사실상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밟고 아슬아슬하게 서있었지만 말이다. 침대 시트를 먼지 털 듯 팡팡 두드리자 코끝으로 포근한 향이 풍겼다. 이것도 아이의 향기겠지, 나는 오늘로 어른이 되는 거야.

 

 

 


 희미하게 미소 지은 그가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왔다. 정국은 이 상태로 지금부터 한 시간을 버텨야 한다. 그는 이를 버틴다는 개념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새벽 한 시가 되기 이전 에 감은 눈 그대로 잠들어버릴 가능성이 내내 깨어있을 가능성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았어도 잠이 들지 않으니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빽빽이 차오른다. 
 
몸은 점점 자라는데 정신의 성장은 없다고 , 그게 얼마나 두려운 건지 모두가 알아야 해 . 


 그 언젠가 선생님에게서 들었던 문장이 의식 위로 맴돌았다. 웃음기 싹 뺀 그 목소리가 어린 정국에게 꽤나 큰 겁을 주었던 건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혼자 그 문장을 곱씹으며 상상을 펼치곤 한다. 평소 같았다면 벌써부터 자고 있었을 텐데 기대감인지 걱정인지 모를 것들 에 휩싸여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몸이 뒤척이며 가지런한 이불을 뒤섞었다. 시각을 제외한 모 든 감각은 시선의 공백을 메우려는 듯 그 능력을 평소보다 더 곤두세웠다. 창 바깥에서 나뭇가 지가 약한 바람과 함께 흔들린다. 촉각 또한 도드라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목뒤를 쓸어 내린 손이 어제보다 더 차갑다. 방이 좀 추운가, 보이진 않지만 구겨져서 엉망이 되었을 이불자 락을 끌어당기던 정국이 갑작스레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분명 다른 누군가의 숨소리였다. 

 

 

 


 '방금 뭐였지?'

 

 

 


 어느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감각이 정체 모를 그를 쫓았다. 허리 옆으로 쥔 주먹만 쥐었 다 폈다 반복했다. 손을 들어 허공을 충분히 휘저을 수 있었지만, 정말로 그 누군가에게 닿는다 면? 더 따질 것 없이 정국은 눈을 떠버릴 게 분명하다. 죄 없는 이불 끝이 뭉개졌다. 방 안의 누군가는 제 존재를 감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숨결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게 피부로 느껴졌 다. 대체 누구야? 정국은 눈을 뜨고 그를 추궁할 수 없는 제 자신이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옅게 반복되는 숨소리만을 주고받으며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


 "헙-"

 

 


 정국은 순간적으로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 바보 같은 소릴 냈다. 볼 근처에 낯선 숨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실수로 스친 숨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고의적으로 후- 하고 분 것만 같은. 누군지는 모르지만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모습 한 번 드러내지 않고 꾸준히 정국에게 장난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

 

 

 


 "진짜로 누가 있었다니까?"


 "그거 마을 어른들이 거짓말 친 거야. 혹시나 목소리가 들리면, 이라고 했잖아. 혹시나. 이건 그냥 겁만 준 거라고."

 

 

 

 

 


 제일 친한 친구마저 그를 믿어주지 않으니 답답해서 죽을 노릇이었다. 전정국, 너 맨날 눈만 감으면 바로 자잖아.. 그거 꿈이야. 정신 좀 차려라. 정국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진짜 꿈이었 던 걸까, 분명히 한 시 정각을 알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는데. 

 

 

아리송한 의문은 7일의 할로윈 둘째 날 밤이 되어서야 풀렸다. 

 


 어젯밤 기억 때문인지 정국의 방 안은 더 음산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침대 앞에서 크게 한 숨을 들이킨 그는 어색하게 몸을 움직여 이불을 덮고 누웠다. 정말로 꿈이었다면 내가 좀 민망 해지고 말겠지, 시계가 59분을 향하는 걸 보고서야 정국이 눈을 감았다. 침을 꼴깍 삼키는 바람 에 목이 울렁거렸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지금쯤이면, 거의 40분. 아니 50분? 시계조차 볼 수 없으니 얼마나 지났는지 알리가 만무했다. 더 버텨야 할 시간을 알아야 기분 좋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정국이 뒤척이며 누운 자세를 바꿨다. 순간, 

 

 

 

 

 


 "정국아," 

 

 

 

 

 


 처음 듣는 목소리가 정국의 감각을 일깨웠다. 수면 밑 깊숙이까지 가라앉았다가, 불현듯 물 밖 으로 고개를 빼낸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잘못 들은 줄 알았지.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쿵 하는 큰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떨어진 정국이 제 곁에서 작은 웃음소리를 듣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꽤 세게 떨어졌는데도 어느 곳 하나 얼얼한 구석은 없었다. 오히려 몸은 바닥에 부딪히 기 전보다 더 둔해진 것 같았다. 다행히도 눈은 용케 감고 있었다. 새삼 정국은 제 스스로의 간 크기에 놀랐다. 어른들이 말하던 그 못된 영혼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제 상상과 전혀 달랐다. 목소리는 가지런히 재단한 실크 자락처럼 매끄러웠다.

 

 

 

 


 "어제는 미안해. 내가 기분이 좋아서 그랬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는 그렇게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국은 꼭 매일 보는 친구에게 대화를 꺼내듯 친근한 그 목소리에 대답을 해줘야 할지 한참 동안 고민했다. 악한 영혼이 사과 까지 할 리가 없는데, 또 내 이름은 어떻게 알지? 입가에 머무르는 질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 다. 

 

 


 "목소리 듣고 싶어."


 "…"


 "입도 열면 안 된대?"

 

 


 입도, 라고 말하는 걸 보면 그는 정국이 눈을 떠서는 안 될 상황에 있음을 알고 있는 게 확실 했다. 여전히 아무런 대답을 않은 정국은 혼자서 그 목소리의 정체를 상상했다. 발이 바닥에 닿 는 걸음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럼 공중에 떠있나? 갑자기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성인이 되 는 할로윈 의식이 이렇게나 무서운 것일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정국아아." 


 "…"


 "한마디만."

 

 


 애교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정국의 대답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정국의 귀가 새빨갛게 뜨거워졌다. 제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바닥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가슴 근처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짧은 시간 동안 지나치게 놀란 덕에 생긴 결과물일지도 모 른다. 침대로 다시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근처에서 이 목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정국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코끝에서 낯설고도 익숙한 향취가 돌았다. 누군가의 숨결과 더불어서. 이유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어요?"


 "난 항상 이 자리에 있었어, 정국아. 여태 너를 해친 적도 없지. 봐, 넌 지금 건강한 18살이잖아?"


 "…"


 "곧 정각되겠다. 걱정 마, 금방 눈 떠도 돼. 그리고,"

 

 

 

 


 목소리 역시 좋네. 

 


 낯선 그가 건네는 문장에서는 밉지 않은 웃음소리가 마침표를 대신했다. 그의 말대로 금방 울 린 종소리 뒤에는 정국의 뒤척거림을 제외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뜬 정국이 중얼거렸다. 진짜 있었어, 꿈이 아니었다니까. 
 

 

 

 

 

 

 

 할로윈의 밤은 아직 다섯 번 더 남아있었다. 


 
 첫 날밤에는 그저 숨소리, 둘째 날 밤에는 이름을 부르며 말 걸어왔고, 셋째 날 밤부터는 원래의 목적이 그것이었는지 은근히 정국에게 눈을 떠달라고 보챘다. 그리고 이런 소리들은 정국에게만 머무는 것 같았다. 정국 주변의 그 누구도 이상한 목소리나 숨결을 접했다는 사람은 없었 다. 종종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는 왜 제가 어른이 되는 일을 그렇게까지 막으려 드는지. 언제부턴가 누군가의 목소리는 두 사람의 대화로 변했다. 정국은 부드러운 그 목소리에 홀리듯 꼬박 꼬박 대답했다.

 

 

 

 

 

 "네가 아주 어릴 때부터 너를 봐왔어."


 "어떻게요?"


 "이렇게, 가까운 곁에서."

 

 

 


 거짓말이 아니었던지 목소리의 주인은 정국이 말한 적도 없는 그의 어린 시절을 곧잘 읊었다. 네가 6살 때, 이 침대에서 저기 저곳까지 뛰어내릴 수 있다면서 자신만만했었잖아. 아, 저곳이 라고 하면 넌 눈을 감아서 모르려나? 궁금하면 잠깐만 앞을 봐도 되고. 

 


 뻔한 속임수였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정국을 허무한 실패 쪽으로 이끌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감각 틈새로 돋아나는 궁금증을 못 이기고 정국이 마침내 그에게 물었다. 끝끝내 눈을 감은 채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게 보일까, 머릿속에 그렸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목소리 로부터 대답이 돌아왔다.

 

 

 

 

 


 "이름은 박지민인데,"


 "아, 지민…."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아?"

 

 

 


 나는 연한 갈색의 머리칼을 가졌고, 눈동자 색은 좀 더 진해. 항상 검은색 천으로 된 얇은 로 브를 걸쳐. 아, 그리고 신발은 신지 않았어. 바닥이 닿는 촉감을 즐기거든.

 

 

  할로윈의 네 번째 밤, 꿈결과 같은 지민의 목소리가 방 전체에 희미하게 울렸다. 다른 친구들 에게는 절대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저에게만 들린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첫째, 이는 정국의 무의식에서 들려오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둘째는, 정국이 단단히 미쳐버린 것. 

 


 정국은 속으로 두 번째 경우가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다. 

 

 

 

 

 

 

 


 5일째가 되어서야 그가 조금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정국은 이제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한테만 목소리가 들렸다'고 이실직고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들은 정말로 그런 경험은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정국이 아무리 아니라고 설명을 한 들, 정신 나간 놈 취급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밤이 되어서 눈을 감고 들려 오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지금도 억울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내가 겪은 일들을 아무 도 알아줄 수 없다니, 불만스럽게 아랫입술을 깨문 그때. 정국의 온몸이 굳게 얼어붙었다. 그의 뺨에 사람의 손과 같은 무언가가 닿았다.

 

 

 

 

 


 "나야."

 

 

 

 


 아주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온도의 보드라운 손가락은 정국의 뺨에서 조심조심 움 직였다. 턱 밑으로, 그리고 다시 입술 위로. 강하게 닿으면 깨져버릴 무언가를 소중히 다루기라 도 하듯 신중한 손길이다. 이 상황에서 정국은 그가 닿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반쯤 미칠 것 같 았다. 물리적으로 지민의 존재가 드러났다. 정국이 미쳐버린 것도, 지민이 유령인 것도 아니라는 게 마침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지민의 엄지손가락이 정국의 윗입술을 살짝 눌렀다. 떨리는 정국의 숨결이 그대로 맞닿았다. 

 

 

 

 "어때?"


 "…"


 "우리 처음으로 닿았어."


 "…영혼 같은 게 아니었어요?"


 "죽지도 못하는데, 무슨."

 

 

 

 


 말끝으로는 늘 그래왔듯이 정국을 설레이게 하는 이전의 그 웃음소릴 냈다. 함께 닿고 싶은 마 음에 정국이 앞으로 슬며시 손을 뻗으면 지민은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 교묘하게 그를 피했다. 눈을 뜨면 나를 찾을 수 있잖아, 아직도 자신이 없어? 달큰한 목소리가 그를 꾀어낸다. 고작 5일 밤만 지난 게 전부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몇 날 밤 새에 알 수 없는 정이라도 든 건지, 정국은 낮 동안 지민이 보고 싶었다. 어차피 밤에도 눈을 뜨고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보고 싶다기보다는 그립다거나 기다리게 된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도 같다. 

 

 

 

 


 해가 밝은 낮이나 자정 이전의 시간 동안은 정국의 오감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오감 중 시각이 묶여버린 밤 시간 동안에는 도리어 모든 감각의 합보다 더 큰 자극이 그를 덮쳤다. 자정을 알리 는 종이 울리고 지민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정국에겐 보이지도 않는 눈앞의 광경과 그가 닿는 피부의 감각이 또렷하게 살아났다. 

 

 

 


 할로윈 의식의 여섯 번째 밤이었다.

 

 

  "내일 지나면 어른이 되겠네. 너는 열아홉 살도 될 거고, 스물두 살도 될 수 있겠지."


 "응, 당연하잖아요."


 "그거 알아, 정국아?"

 

 


 나는 당연한 존재가 아니야. 내가 네게 늘 떨릴 만큼 새로운 자극이면 좋겠어.


 살아있는 모든 감각이 입술께로 집중을 쏟아냈다. 입술에 닿았던 촉촉한 숨이 다시 정국의 이마 위 머리카락에 천천히 부딪혔다. 정국만 누워있었던 침대 위로 가벼운 무게감이 내려앉았다. 한꺼번에 들이킨 숨을 몇 초 이상 거두지 못하고 있었으나 속이 전혀 갑갑하지 않았다. 깊은 바 닷속에서 숨을 한참 참아내고도, 죽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 같았다. 

 


 당신이, 당신이-

 

 

 

 


 "보고 싶어요."

 

 

 

 


 결국에는 정국이 백기를 들었다. 들이쉬고 내뱉는 숨이 제 맘 같지 않았다. 가슴은 제멋대로 요동치며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두 눈은 뜨지 못했다. 지민이 살풋 웃으며 깔끔한 대 답을 꺼냈다.

 

 

 

 


 "보면 되잖아."

 

 

 

 새벽 한 시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댕- 하며 방 안까지 들어왔다. 입술 틈새로 제발, 제발을 읊조리며 급하게 눈을 뜬 정국이 마주한 것은 아무런 흔적조차 없는 제 방 벽지였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창가 너머로 떠오를 때까지 정국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제야 속이 갑갑해졌다.

 

 

 

 


 그는 정국의 열아홉, 스물둘보다 당연하지 않은 존재라고 했다. 남들은 너무도 편하게 어른에 다다르는데, 일곱 밤 동안 한 시간씩 눈을 감고 버티는 일이 자신에게만 이렇게나 힘겨운 일인 게 분했다. 가진 것 중에 제일 강한 게 의지라는 그도 어젯밤에는 정말 아슬아슬했다. 모든 사 람이 축복하는 바른길 속에서 자꾸만 다른 길로 엇나가려고 움찔거리는 제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정국은 또다시 자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방 안에 자신의 것이 아닌 숨소리가 느껴졌다. 이제는 낯선 숨결에 몸이 굳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그가 찾아옴으로써 자정의 분위기는 완벽해진 것 같았다. 정국은 할로윈 일곱 번째 밤인 오늘, 침대 위에 누워있지 않았다. 그저 그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누운 상태에서는 지민에게 손을 뻗는 게 괜히 더 어려운 느낌이었기에.

 

 

 

 


 "…"


 "왔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정국아."

 

 

 


 정해진 순서였던 것처럼 지민이 정국의 감긴 눈에, 볼에, 그리고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 다. 맞부딪힌 상태로 고요하게 머물던 입술은 조금씩 벌어졌다. 달달한 향이 퍼지는 틈으로 애교 섞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국이 제 앞의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살갗은 만지지 못했지만 그 의 손에 옷자락과 같은 부드러운 소재가 스쳤다. 그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잠시 싸늘하게 죽었다가 비로소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긴장이 정국의 머리를 스쳤다.

 

 

 

 

 


 "네가 날 볼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정국아."


 "…왜,"


 "한 번만 봐 줘…. 마지막으로 눈 뜬 네가 보고 싶어."

 

 

 

 

 


 상냥한 지민의 목소리가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속삭였다. 감은 눈 위로 정국의 속눈 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더는 참아내기 힘들었다. 한순간에 멎었다, 머릿속으로 뒤엉키던 출처 없 는 두려움부터 어른이 되는 일을 정말로 포기해버릴까 하는 딜레마까지 전부.

 
 오늘이 마지막이야, 마침내 정국은 두려움의 시작점을 깨달았다. 그는 지민의 달고 우아한 목소리를 영영 제 기억 속에서 지워버릴까 봐, 그게 무서운 것이었다. 결국 정국이 두 눈을 떴다. 

 

 

 

 

 


 또 눈앞에 벽지만 보이는 상황이 벌어질까 걱정하며, 천천히 눈을 뜬 그의 입이 멍한 감탄사와 함께 갈라졌다. 지민이 이전에 제 입으로 묘사했던 연갈색 머리카락과 매혹적인 눈가가 정국의 몽롱한 시선 앞으로 자리 잡았다. 이토록 황홀한 광경을 그는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마주한 제 모습을 만끽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이 지민은 잔잔하게 미소를 띨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정국 이 떨리는 손을 움직이며 지민의 모습을 곱씹는 것처럼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창틈으로 들어오 는 약한 빛이 지민의 볼록 올라온 볼을 비춘다. 그 위를 꽃잎 건드리듯 톡톡 만져보기도 하고, 숱 많은 그의 머리칼이 움직임에 찰랑거리면 살살 쓸어보았다. 마지막 시선은 또다시 입술에 멈춰 섰다. 정국의 붉은 손이 지민의 턱을 고집스레 감싸 쥐었다.

 

 

 

 

 

  “예뻐요,”


 “…”


 “다 포기할 만큼.”

 

 

 


 비로소 모든 감각이 살아있는 키스를 나눈다. 이미 온전한 어른이 되는 일은 엉망으로 꼬여버렸음에도 이상스럽게 정국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아주 어릴 적부터 꾸준하게 배워왔던 성숙한 어른에 대한 환상은 이제 그에게 무의미했다. 이 얼마나 감미롭고 아름다운지, 뒤섞이는 혀와 일렁이는 목을 타고 정국은 그제서야 피가 통하는 기분을 만끽했다. 

 

 

 

 

 


 "어른이 된 걸 축하해."

 

 

 

 


 무슨 소리지? 분명 나는 방금 전 입맞춤을 위해 앞으로의 전부를 저버렸는데. 가늘게만 뜨고 있던 눈을 다시 크게 떴을 때, 지민이 살며시 웃어보였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영원히 나랑 노는 거야. 알았지?"

 

 

 

 


 해피 할로윈.

 

 


 시럽이라도 바른 듯 달달한 목소리가 정국의 귓가를 발칙하게 깨물었다. 어김없이 정각을 알리 는 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정국이 눈을 번뜩 떴다. 가위라도 눌렸는지 한참을 고생한 것처럼 몸에 힘이 들어서지 않았다. 고개를 몇 번 갸웃거렸다. 눈을 뜨고 지민을 바라보던 그가 어떻게 또다시 눈을 뜰 수 있는 건지 찬찬히 기억을 되짚다가, 팍 하는 탄식이 터진다. 

 

 

 


 아, 이제 정국은 꿈속에서 영원히 18살의 아이로 머물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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