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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할로윈데이의 밤.

 

 

 

정국은 창문 밖으로 가 휘영청 떠있는 보름달을 확인하고 옆에 널부러져있던 후리스를 집어 탁탁 털고는 주섬주섬 걸쳐입었다. 콧잔등까지 내려온 동그란 안경을 다시 눈쪽으로 올리고, 방금까지 봤던 책은 책갈피를 꽂아 흠이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책을 덮었다. 책 제목은 [요괴 대백과사전]

 

정국은 식비를 아껴 라면만 먹으며 품에 얻은 한정판 책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표지를 쓰다듬고는 나갈 채비를 마쳤다.

 

 

 

"후우.."

 

 

 

작게 한숨을 쉬고 두 주먹을 꼭 쥐며 안경알에 가려진 맑은 눈을 반짝였다. 오늘은 할로윈 밤이고 보름달까지 떴으니까 신비한 존재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늑대인간이라던가 뱀파이어라던가.. 하다 못 해 말 하는 호박이라던가. 누군가 들었으면 그런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며 비웃었을 내용을 속으로 생각하며 정국은 아까까지 봤던 요괴들의 특징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곤 집을 나섰다. 아자, 전정국 화이팅!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건물에 정국의 우렁찬 목소리가 퍼져나가자 옆집 사람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문을 타고 넘어왔다. 야 이 새끼야! 건물 혼자 쓰냐!

 

 

 

-

 

 

 

7시부터 11시인 지금까지 번화가만 쭉 돌았는데 이렇다 할 수확이 없었다. 정국은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계속해 거리를 걸었다. 요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를 하나라도 찾기 전까진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특히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요괴의 모든 것] 카페에 이미 야부리를 털어놨기 때문에 더더욱. 요괴가 존재함을 믿지 않는 회원들의 생각을 바꾸겠다고 할로윈 밤에 꼭 증거를 찾겠다고 큰소리를 떵떵 쳐놨지만 사실 정국도 큰 자신은 없었다. 분명히 존재하는 건 확실할텐데! 눈 앞에 보이질않으니.. 그냥 그 회원들 강퇴나 해버릴 걸 그랬다. 뒤늦은 후회를 하며 정국은 눈에 불을 켜고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할로윈데이라고 분장을 하고 삼삼오오 뭉쳐서 꺄르르 웃는 사람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쳐다보던 정국은 지나가던 남자와 손등이 스치자 파르르 떨며 눈을 돌려 뜨고 유유히 걸어가고 있는 남자의 동그란 뒷통수를 쳐다봤다. 방금 분명히..

 

 

 

"저기요!"

 

 

 

손이 얼음장처럼 찼어! 이건 분명해!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정국은 당장 튀어나가 남자의 손을 붙잡고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뱀파이어지!"

 

 

 

보통 사람 같으면 무슨 개소리를 하냐며 욕을 뱉고 손을 뿌리치고 갔을 텐데, 남자는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리고 두꺼운 입술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 하려 하다가 정국의 동그란 눈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좌우로 굴리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아..아아...아, 아닌데요..."

 

 

 

남자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정국은 웃으며 남자의 차가운 손을 자신의 따듯한 손으로 꽉 잡았다.

 

 

 

 

 

 

 

정국의 손에 이끌려 온 남자는 계속해 불안한 표정으로 정국의 방 안을 이곳저곳 살펴봤다. 정국은 그런 남자를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물어봤다.

 

 

 

"이름이 뭐예요?"

 

 

 

남자는 눈을 굴리며 입술을 조개처럼 꾹 닫았다가 살짝 열고 아직까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민 드..팡터크.. 모치스요.."

 

 

 

뭐.. 뭐? 빵떡.. 모찌? 정국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지민의 말랑한 볼을 한 번 보고는 아, 저래서 빵떡 모찌구나.. 생각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그.. 지민 빵떡 모찌님. 아, 너무 길다. 지빵모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한국 이름 박지민입니다."

 

"아니 그럼 그냥 박지민이라고 하면 됐잖아요!"

 

"그건.. 당신이 제가 뱀파이어란 걸 알고 있어서.."

 

 

 

지민이 정국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말끝을 흐렸다. 그리곤 다시 입을 열어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자기가 뱀파이어란 걸 알았어요?

 

 

 

"손이 차가워서요."

 

 

 

겨우 그걸로? 지민이 고개를 갸웃하자 정국이가 의미심장하게 씩 웃으며 안경을 치켜올리더니 자신의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있는 요괴 대백과사전을 가져왔다. 지민은 혹시 뱀파이어 헌터가 아닐까 싶어 긴장한 마음을 살짝 놓았다. 평범한 요괴 오타쿠였구나!

 

 

 

"근데 진짜 뱀파이어 맞죠..?"

 

 

 

책을 팔락거리며 넘겨 뱀파이어란 대제목이 쓰여있는 페이지를 피고 읽던 정국은 책의 내용과 더불어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랑 영 달라 씁- 하는 소리를 내고 책과 지민이를 번갈아 봤다. 사실 감으로 때려맞추긴 한 건데.. 뱀파이어 아니고 떡 수인 아닐까?

 

 

 

지민은 고민을 하다 이내 동공을 빨갛게 변하게 하고 송곳니도 뾰족하게 만들어 보여줬다. 정국은 그걸 보고 겁을 먹긴 커녕 눈을 더 반짝반짝 빛내면서 우와! 감탄사를 뱉고는 지민의 얼굴 앞으로 훅 다가와 지민의 손을 잡았다.

 

 

 

"절 뱀파이어로 만들어주세요!"

 

 

 

정국의 뜬금없는 발언에 지민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자 절로 뭐임? 하고 말이 나왔다. 지민이 거절할거라 생각한 정국은 지민이 앞에 무릎을 꿇고 구구절절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21살 전정국이라고 하고요. 국적은 대한민국, 지금 국민대학교 경호학과 재학중입니다. 활동하고 있는 부는 미스테리 오컬트부인데요. 회원이 저까지 둘 밖에 없어서 곧 폐부할 위기예요. 너무 안타까운 일이죠.. 아무튼 저는 어린 시절부터 뱀파이어가 굉장히 되고 싶었고, 동경하고 있었어요. 이 점 어여삐 봐주셔서 절 뱀파이어로 만들어 주셨음 합니다!

 

 

 

정국은 머리가 땅에 박힐 정도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지민은 당황으로 물든 눈을 하며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남준이 형! 나 미친놈한테 걸린 거 같아!

 

 

 

-

 

 

 

정국에게 계속해서 시달리던 지민은 정국에게 폰번호를 주고 나서야 정국에게 풀려날 수 있었다. 지민은 핸드폰에 찍혀있는 '예비 뱀파이어 전정국'이라 저장된 연락처를 슬쩍 보고는 걸음을 옮겨 집으로 갔다. 근데 어쩌지? 인간한테 정체를 들킨 걸 알면 남준이 형이 혼낼텐데.. 어떻게하면 덜 혼날까 고민을 하던 사이 핸드폰에서 진동이 길게 울렸다.

 

 

 

[예비 뱀파이어 전정국:지민님!]

 

[예비 뱀파이어 전정국:잘 들어가고 계세요?]

 

[예비 뱀파이어 전정국:저 차단하시면 안 돼요!]

 

 

 

카톡 메시지 위로 정국의 들뜬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차단을 하려던 지민은 괜히 뜨끔해져 손을 내려 굳이 답장을 하지 않고 액정을 껐다. 이후로도 끊임없이 쏟아지는 진동에 지민은 핸드폰을 무음상태로 돌렸다.

 

이내 도착한 집 앞에서 지민은 길게 한숨을 쉬고 조용히 들어갔다.

 

 

 

"왔어?"

 

"아, 깜짝이야!"

 

 

 

들어가자마자 자길 반기는 남준의 모습에 지민은 화들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지민은 미동도 하지않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남준을 슬쩍 보다가 무언가 숨기는 듯이 우물쭈물거렸다. 남준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행동하는 지민을 보고 이상함을 감지하고 지민에게 물어봤다.

 

 

 

"지민이 너 뭐 숨기는 거 있어?"

 

"어.....음......"

 

 

 

지민의 동공이 더 빠르게 떨렸다. 어떻게 알았지? 내 포커페이스는 완벽했을 텐데!

 

 

 

"아무 일도.. 없.. 었는데? 하, 하하.."

 

 

 

누가봐도 어색하게 말하는 지민을 보며 남준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당황하는 거 보니 거짓말의 레벨이 다른가본데..

 

 

 

"너 설마 또 뱀파이언 거 들켰니?"

 

"헉."

 

 

 

지민은 숨을 헙 들이키고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으로 남준을 봤다. 남준은 지민이 반응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피곤하단 표정을 지었다.

 

 

 

"박지민."

 

"혀, 혀엉..."

 

 

 

남준이가 껌뻑 죽는 애교가 넘치는 말투를 써도 남준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진짜 어떡하지.. 눈을 도로록 굴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남준은 그런 지민이 반응에 화도 못 내고 한숨을 쉬며 지민의 은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이제부터 들키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그 인간.. 죽여버린다고.."

 

 

 

지민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지민은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답지 않게 인간의 생명을 헤치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다. 내가 거짓말을 못 해서! 몇백년을 살았지만 아직까지 익숙해지지않는 거짓말에 지민은 자신을 자책하기 시작했다.

 

 

 

"안.. 안 죽이면 안 돼? 걔.. 착해보였는데..."

 

 

 

뱀파이어면서 정이 왜이리 많을까. 남준은 쓰게 웃으며 지민의 머리를 다시 쓸어내렸다. 이 정 때문에 인간들한테 당한 게 몇 번 인 지.. 이번에도 지민이 상처받을까봐 지민 대신에 먼저 대상을 없애려고 하는 남준이었다.

 

 

 

"근데 형..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 돼?"

 

 

 

뜬금없는 지민의 말에 남준은 귀를 의심했다. 이런 걸 물어볼 애가 아닌데.. 누구 뱀파이어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오늘 만났던 인간이.. 자기 뱀파이어로 만들어 달라고 했거든.."

 

 

 

지민은 핸드폰을 켜 안 읽은 메시지가 쌓여있는 정국과의 대화방에 들어갔다. 정국이는 지민이가 보든 안 보든 상관을 전혀 하지 않는 지 혼자서 뱀파이어에 대한 예찬론을 펼치고 있었다. 자기가 뱀파이어가 되면 좋은 점을 어필하는 채팅까지 모조리 읽은 남준은 미간을 짚었다.

 

 

 

너 이상한 놈한테 걸렸구나..

 

 

 

 

 

 

 

정국은 지민이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컴퓨터를 켜 자신의 카페에 게시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제목:뱀파이어는 실재합니다!]

 

 

 

제목만 썼는데도 정국은 심장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정국은 히죽거리며 타이핑 하던 내용을 이어나갔다.

 

 

 

[오늘 뱀파이어를 만나고 왔습니다! 지나가다가 손을 스쳤는데 말 그대로 손이 얼어붙는 기분이더군요. 혹시나 해서 뱀파이어냐 물어보니 맞다고 했습니다! 믿기지 않으실 지도 모르는데 진짭니다. 책에서 표현된 내용과는 조금 다르더라구요. 붉은 눈에 뾰족한 송곳니가 있는 건 맞지만 평소에 다닐 땐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다니는 듯 합니다. 그리고.. 볼이 통통해서 귀여웠어요. ^^]

 

 

 

깜짝 소식! 제가 곧 뱀파이어가 될 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추신까지 알차게 쓴 정국은 게시글 등록 버튼을 누르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부터 지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중에 다시 만날 땐 뱀파이어에 대해 궁금했던 걸 물어봐야지! 정국의 입꼬리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지민의 생각을 하며 계속해 실실웃던 정국은 울리는 벨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고 폰을 확인했다. '뱀파이어 지민님'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정국은 허둥지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국..씨? 정국아..?]

 

"정국이라고 말 편하게 해주세요."

 

[흠흠, 정국아 그 있잖아..]

 

 

 

지민이 뜸을 들이자 옆에서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지민을 재촉했다. 뭐지? 정국의 눈썹이 잠깐 꿈틀거렸다.

 

 

 

[내일 괜찮으면 만날래?]

 

"네, 네네, 네에?!?!?!"

 

 

 

정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여파로 정국의 코에 걸려있던 안경이 툭 떨어졌다. 정국은 지민이 보지 못 한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새차게 끄덕거렸다.

 

 

 

"당연하죠!"

 

 

 

어쩌면 지민님이 날 뱀파이어로 만들어주겠다고 마음을 바꾼 걸 지도 몰라! 정국은 내일 약속시간을 들으면서 앵무새처럼 네라는 말만 반복적으로 뱉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해가 지는 시간에 정국은 지민이 말했던 카페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집 근처 카페라 그런 지 저녁시간임에도 카페 안은 한산 했다. 정국은 앞에 놓인 라떼를 휘저으며 지민을 기다렸다.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정국의 고개가 출입문을 향했다. 지민은 밤인데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오는 키가 큰 남자도 똑같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지민이 정국을 알아보고 남준과 함께 정국의 테이블로 성큼성큼 왔다. 지민아 역시 먼저 기선제압을 할 땐 선글라스야. 남준은 그 말이 무색하게 테이블에 앉아 선글라스를 빼다가 그만 안경대를 부숴버리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정국은 새로운 뱀파이어의 등장인가 싶어 눈을 빛내며 지민과 남준을 번갈아 쳐다봤다. 지민님 혹시.. 정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자기소개를 했다.

 

 

 

"남준 드 건시르 세크시입니다. 지민이와 마찬가지로 뱀파이어고요."

 

 

 

이번엔 또 뭐야, 건실.. 섹시? 뱀파이어는 다들 이런 이상한 이름을 쓰나? 정국은 자신의 데이터에 뱀파이어가 되려면 이상한 이름을 써야한다는 항목을 추가시켰다.

 

 

 

"자기소개는 이 쯤에서 끝내도록 하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

 

"당신은 오늘 죽습니다."

 

 

 

저에게 말이죠. 남준은 평화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준의 폭탄발언에도 정국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지민이 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남준을 쳐다보며 등짝을 퍽 때렸다. 정국은 아까보다 조금 더 흥분된 표정으로 서서히 바꼈다. 정국의 머릿속에선 죽는다=인간으로서의 삶이 끝난다=뱀파이어가 된다. 라고 이미 자동번역이 끝마쳐진 상태였다.

 

 

 

"저, 저를 정말로.. 뱀파이어로 만들어주신단 소린가요..?"

 

 

 

뜬금없는 소리에 이번엔 남준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국은 신난 얼굴로 남준의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려요! 남준은 지민을 돌아봤다. 지민은 고개를 절레절레젓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렇다고 했잖아. 정국은 흔들던 손을 멈추고 메모장과 볼펜을 꺼냈다.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 궁금한 거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 까요?"

 

 

 

갑자기 진지해진 정국의 눈빛에 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준까지 정국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렸다. 방금까지 죽여버리겠다던 기세등등한 살기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정국은 지금까지 궁금했던 뱀파이어에 대한 질문을 와르르 쏟아냈다. 지민은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들을까 싶어 알바생을 흘긋 봤지만 알바생은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 꿀을 빨기 위해 스마트폰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질문 세례가 끝나고 정국은 뿌듯한 표정으로 메모장을 덮었다. 남준과 지민은 혼이 쏙 빨린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혹시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들어본 적 있으세요?"

 

 

 

남준과 지민 둘 다 고개를 저었다. 남준이 뱀파이어가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드려면 뱀파이어가 인간에게 타오르는 듯한 사랑을 느끼고 있을 때만 할 수 있다고 설명을 했다. 정국은 남준의 말에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둘을 휙휙 둘러봤다. 혹시... 저랑 연애 하실 분? 둘 다 정국의 애처로운 시선을 피했다.

 

 

 

카페에서 나올 때 정국과 남준은 이미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죽여버리겠다고 하고서는.. 그래도 차라리 이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 지민은 아직도 떠들고 있는 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뒷통수가 동그랗네. 정국의 뒷통수를 보며 동그란 원을 생각하고 있을 때 정국이 뒤를 돌아 지민을 쳐다봤다. 왠지 몰래 쳐다보다 들킨 기분에 지민이 흠칫 몸을 떨었다. 정국은 지민의 앞으로 척척 다가왔다.

 

 

 

"지민님!"

 

"응?"

 

"저랑 100일만 한 번 만나보지 않을래요?"

 

"....뭐?"

 

 

 

지민이 눈을 왕방울만하게 뜨고 정국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래. 지민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느낀 정국은 서둘러 다음 말을 꺼냈다.

 

 

 

"눈 딱 감고 100일만 저랑 사겨주세요! 100일 지나도 감정의 변화가 없으면 저도 더 이상 귀찮게 조르지 않을게요!"

 

 

 

정국의 제안에 지민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영생을 사는 뱀파이어에게 100일은 눈 한 번 깜빡하는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민은 자신이 정국에게 코가 꿰일 일은 없다고 생각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100일동안 연인행세를 해야하는 건 좀 꺼림칙했지만 정국을 떼어내려면 이 정도야. 정국은 눈가에 주름이 접히도록 씩 웃고는 지민의 손을 잡았다. 차갑지만 보들보들한 지민의 손이 기분이 좋았다.

 

 

 

"연인 사이에 님이라고 부르는 건 좀 이상하니까 형이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지민이 형?"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지민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연애라고는 못 해봤을 것처럼 생겨가지곤.. 많이 해봤나? 지민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정국은 쑥쓰러운 지 코 밑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형, 그러면 집 가서.. 연락 할게요. 잘 부탁드려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국은 집에 오자마자 네이버를 키고 검색창에 '뱀파이어와 연애 하는 법', '뱀파이어 꼬시는 법' 이라는 문장을 쳐보고 있었다. 역시 검색 결과는 전무. 그나마 나온 거라곤 만화책이나 인터넷 소설 뿐이었다. 정국은 노선을 바꿔 뱀파이어란 글자를 빼고 평범하게 연애하는 법을 찾았다. 어떻게 해야 지민이 넘어올까? 정국은 자신도 지민을 사랑해야한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지민이 자기를 사랑할 수 있게 될 방법만을 찾고 있었다.

 

 

 

얼추 정보를 찾으니 벌써 자정에 가까워지는 시각이었다. 정국은 핸드폰을 확인하고 지민에게 연락을 했다. 얼마간 신호음이 들리고 통화가 연결 되었다. 사귀는 사이에는 어떤 말을 해야하더라. 갑자기 새하얘진 머리에 정국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있었다. 침묵이 이어지다 지민이 결국 먼저 입을 뗐다.

 

 

 

-왜..

 

 

 

특유의 늘어지는 말투가 정국의 귀에 꽂혔다. 정국은 지민이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양손으로 공손하게 핸드폰을 받쳤다. 형, 형.. 잘 들어갔어요? 지금 뭐해요? 아 참, 저희 데.. 데이트는 언제 할까요? 그리고 형이 좋아하는 거랑 싫어하는 건요?

 

 

 

-하나 씩 물어봐!

 

 

 

네, 네! 정국이 호흡을 가다듬고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뒤 한 가지 씩 질문을 했다. 지민은 조곤조곤하게 정국의 질문이 들어올 때 마다 대답을 했다. 응, 잘 들어갔어. 지금은 너랑 통화하고 있잖아?, 데이트는 아무 때나 좋은데.. 낮은 안 되는 거 알지?, 내가 좋아하는 건 술, 패션, 싫어하는 건.. 음.. 너무 많은데. 지민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정국이 너는? 지민이 역으로 질문하자 메모를 하고 있던 정국은 화들짝 놀랐다.

 

 

 

"제가 좋아하는 건.."

 

 

 

잠시 생각을 하던 정국은 자신이 좋아하는 요괴들에 대해 좔좔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점점 길어지는 통화에 지민은 결국 정국의 말을 잘라버렸다. 정국은 30분은 기본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고 아쉬운듯한 소리를 냈다.

 

그 후로도 이것저것 대화를 하던 둘은 40분 정도 더 통화를 하고 나서야 겨우 통화를 끝낼 조짐을 보였다.

 

 

 

-내일 학교 가야하지 않아? 안 자?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얼른 자.

 

"네, 알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응, 잘 자.

 

"내 꿈 꿔요, 지민이 형. 사랑해요."

 

 

 

쪽! 정국이 귀엽게 통화가 종료되기 전 마무리로 입맞춤을 했다. 몇 초 동안 정적이 흐르고 지민이 먼저 전화를 뚝 끊었다.

 

 

 

정국은 아무 말 없이 끊긴 통화에 방금 전 발언이 문제가 있는 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까 본 글에선 연인이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했는데.. 너무 진도가 빨랐나? 정국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혹시나 자신의 호감도가 떨어졌으면 어쩌나 싶어 정국은 황급히 카톡을 켜서 꾹꾹 눌러가며 메시지를 보냈다.

 

 

 

[정국:제가 연애를 한 번도 못 해봤어요.]

 

[정국:혹시 실수를 한다거나 그러면 바로 말 해주세요. 고칠게요.]

 

 

 

정국은 카톡을 전송시키고 얌전히 대화방에 1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1분, 2분.. 시간이 지날 때마다 점점 심장이 조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크게 실수했나보다.. 정국이 크게 한숨을 쉬고 베개에 머리를 박으려고 했다. 그 때 정국의 폰에서 카톡 알림이 울렸다. 정국은 빠르게 핸드폰을 잡고 확인을 했다.

 

 

 

[뱀파이어 지민님:알았어..]

 

 

 

지민의 대답에 정국은 드디어 한시름 놓은 표정이 됐다. 제가 진짜 잘 할게요! 마지막 카톡을 남기고 지민의 이름을 한 번 엄지로 쓸고는 카페 앱을 켜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로 들어갔다. 정국이 올린 게시글에는 댓글이 한 개도 달려있지 않았다. 회원수는 절반이 줄어들어 5명밖에 없었다. 정국은 굴하지 않고 다시 게시글을 작성했다.

 

 

 

[제목:뱀파이어와 사귀게 되었습니다.]

 

 

 

100일 정도 사귀기로 했습니다. 응원해주세요... 정국은 게시글을 올리고 뱀파이어 일지 게시판을 만들까하다가 곧 그만뒀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을 텐데. 할 일을 다 끝내고 나니 점점 졸음이 밀려왔다. 정국은 하품을 쩍 하곤 안경을 벗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오늘은 뱀파이어가 되는 꿈을 꾸면 좋겠다.

 

 

 

 

 

한편 지민은 아직도 정국의 마지막 입맞춤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연인행세를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냥 기껏해야 몇 번 데이트 해주는 게 다일 줄 알았는데.. 아무튼 지민은 얼굴에 열이 확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겉은 창백한 모습 그대로지만. 지민은 자기도 정국에게 맞춰 사랑한단 말을 해야하나 고민했다. 제일 마지막으로 온 카톡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폰을 껐다. 어차피 뱀파이어 되고 싶어서 이러는 걸 텐데. 절대 마음 주지 말아야지. 이번에도 또 데이긴 싫었다.

 

 

 

하지만 지민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지민은 자신에게 사랑한다 계속 표현하는 사람에게 약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

 

 

 

다음 날 정국은 자신의 글에 댓글이 달린 걸 확인하고 카페로 빠르게 들어갔다.

 

 

 

[댓글:하다하다 이제 구라까지 치네. 카페 이름 허언증의 모든 것으로 바꾸는 거 어떰?ㅋㅋ]

 

 

 

겨우 하나 달린 댓글이 이런 거라니! 정국은 씩씩거리며 회원 정보를 클릭했다. 그러나 정국을 반기는 건 이미 탈퇴한 회원입니다. 하는 사무적인 안내 팝업 뿐이었다. 하아.. 한숨을 쉰 정국이 지민과의 대화창을 들어갔다. 아침이니까 자고 있겠지? 정국은 활기차게 톡을 남겼다. 좋은 아침이에요, 형!

 

 

 

 

 

이상하게 시작 된 100일짜리 연애는 의외로 평온하게 굴러갔다. 매일마다 카톡하고 가끔 만나서 데이트를 하고.. 지민도 처음보단 더 정국을 편하게 대했다. 나쁘지 않은 애란 걸 깨닫고 100일동안 연인 본분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이젠 먼저 만나자는 말을 한다거나 먼저 전화를 걸거나 했다.

 

그 중 제일 변한 게 있다면 매일마다 뱀파이어 예찬론을 펼치던 정국은 점점 뱀파이어 박지민이 아닌 그냥 '박지민'에 집중하게 됐다. 처음엔 지민이 형의 뾰족한 송곳니, 붉은 눈이 좋아!로 시작 됐던 감정이 두꺼운 눈두덩이, 말랑해보이는 코, 젤리같이 통통한 입술이 좋아로 변하고 있었다. 정국은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 하고 있었다.

 

 

 

메모장에 지민의 뱀파이어 특성을 쓰던 정국은 점점 다른 지민의 버릇과 특징을 적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할 땐 동공이 떨린다. 그리고 거짓말 굉장히 못 함. 손과 발이 굉장히 작다. 나보다 키가 작다. 목소리는 나긋나긋하다.. 정국은 보던 메모장을 덮고 눈을 감고 지민을 그리기 시작했다. 으음.. 지민이 형 보고 싶다. 그때 정국의 폰이 울렸다.

 

 

 

[지민이 형♥:만날래?]

 

 

 

뱀파이어 지민님에서 바껴 낯간지럽게 하트까지 붙어져있는 지민의 이름이 떴다. 시간은 오후 9시를 넘어 10시로 달려가고 있었다. 정국은 빠르게 네. 하고 카톡을 보내며 옆에 있던 과잠을 들었다. 그대로 입으려다가 지민이 첫 데이트날 뭐 그딴 옷을 입었냐고 눈으로 욕했던 기억이 생각나 정국은 들고있던 과잠을 내려놓고 옷장 안에서 먼지가 쌓인 코트를 꺼내서 툭툭 털고 입었다.

 

 

 

"형!"

 

 

 

정국이 약속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자 지민이 멀리서 총총 다가오고 있었다. 뱀파이어 아니고 요정이지 않을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정국은 어느 새 가까이 온 지민과 눈을 마주침. 지민은 입을 동그랗게 하고 오~ 하고 소리를 냈다.

 

 

 

"웬일로 이런 옷을 다 입었어?"

 

"형이 그때 욕했잖아요."

 

"언제?"

 

 

 

내가 욕한 적이 있어? 지민이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안경을 고쳐 쓰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지민의 손을 잡았다. 처음에 만날 땐 전부 허락을 구하고 했는데, 나름 익숙해진 스킨십에 정국은 많이 친해졌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작게 콩콩 뛰는 걸 느꼈다. 지민의 차가운 손이 정국의 손을 맞잡았다. 평일 밤이라 그런 지 길거리에 사람이 얼마 없었다.

 

 

 

지민은 정국을 데리고 한 바에 들어갔다. 바에 들어가자 사장이 지민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지민은 저를 반갑게 맞는 사장에게 익숙하게 인사를 했다. 정국은 처음 오는 곳에 눈을 굴려 가게 안을 둘러봤다. 세련되고 깔끔한 느낌의 바였다. 지민은 아직도 구경하고 있는 정국을 툭툭 쳤다.

 

 

 

"이런 곳 처음 와 봐?"

 

"네.."

 

"술은 잘 마셔?"

 

 

 

어느 정도는요? 정국은 개강총회 때 마지막까지 자신만 취하지 않아 선배들을 도와 애들을 다 열심히 택시에 날랐던 기억을 꺼냈다. 그 이후로는 잘 마시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정국의 말에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연스럽게 바텐더가 있는 자리로 들어갔다. 정국은 지민의 에스코트를 따라 기다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뭘로 드릴까요, 손님~"

 

 

 

정국이 큰 눈을 꿈뻑거렸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사장을 봤지만 사장은 그냥 웃으며 지민을 보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있으니 지민이 킥킥 웃었다. 나 여기서 근무 했었거든. 아.. 정국이 바보같은 소리를 냈다. 지민은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보라며 정국을 채근했다. 정국은 도수가 높은 칵테일을 아무거나 고르곤 지민에게 허둥대며 주문을 했다. 지민은 주문을 받아들고 빠르게 칵테일을 만들었다. 흔들고 섞고 휘젓고.. 정국은 지민이 하는 행동을 눈에 담았다. 저 조그마한 손으로 뭘 어떻게 만드는 거지? 잠깐 동안의 시간이 지나고 지민은 정국에게 술을 내밀었다. 정국은 술을 받아들고 한모금을 목으로 흘려보냈다.

 

 

 

"우와.."

 

"어때, 맛있지!"

 

 

 

지민은 신난 표정으로 정국의 반응을 기다렸다. 정국은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너무 맛있어요, 어떻게 만든 거예요? 지민은 정국의 반응에 눈을 접어 씩 웃었다. 내가 여기 다닌 게 얼만데! 지민의 뿌듯한 반응을 보던 정국은 다시 한 번 술을 홀짝였다.

 

 

 

지민이 신나서 이것저것 실력을 뽐내며 칵테일을 만들어주자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마신 정국은 오랜만에 올라오는 취기에 결국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취할 것 같으면 말 하지! 지민이 놀라서 정국의 곁으로 빠르게 뛰어왔다. 정국은 차가운 지민의 손을 잡고 뜨끈한 얼굴에 댔다. 기분 좋아...

 

 

 

지민은 붉어진 얼굴로 취한 정국을 낑낑 대며 정국의 팔을 어깨에 두르곤 나중에 또 놀러오라는 사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가게를 나섰다. 정국은 자기보다 작은 지민에게 질질 끌려 갔다.

 

 

 

"저.. 저 똑바로 걸을 수 있어요.."

 

 

 

정국이 지민에게 벗어나 똑바로 걸으려고 하다가 휘청였다. 지민은 혀를 차고 얌전히 따라오라며 다시 정국의 팔을 붙들었다. 내가 널 업고 싶은데 키가 안 돼서 못 하겠다. 다시 팔이 지민의 어깨에 걸쳐졌다. 정국은 지민의 목에 코를 박았다. 지민의 체향이 정국의 코끝을 간질였다. 내가 뱀파이어였으면 바로 지민이 형의 피를 먹었을 텐데. 지민은 정국에게 간지럽다는 핀잔을 한 번 주곤 다시 끙차 힘을 줘서 정국의 자취방으로 무사히 정국을 데려갔다.

 

 

 

아이고 힘들어. 지민은 정국의 침대에 정국을 내동댕이 치듯 내려놓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정국은 침대에 누워 지민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리곤 술김에 지금까지 말 하지 못 했던 본심을 투정부리는듯한 목소리로 꺼냈다.

 

 

 

"형은 왜 제 피 안 먹어요?"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요? 정국이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보니 진짜 지금까지 지민이 피를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정국은 감기는 눈을 겨우 떠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픽 바람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원래 사람 피 잘 안 먹어."

 

 

 

사람을 헤치는 게 싫은 지민은 혈액팩을 공수해서 그걸로 끼니를 떼웠다. 아 그렇구나아... 정국이 잠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왜 먹어줘?"

 

 

 

지민이 장난스럽게 정국의 목덜미를 차가운 손으로 쓸어내렸다. 정국은 지민이 쓸어내린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쿵쿵 방망이질을 했다. 지민이 고개를 숙여 정국의 목덜미를 바로 뜯어버릴 것처럼 송곳니를 세웠다. 지민의 말랑한 입술이 정국의 목에 닿았다. 정국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곧 고통이 느껴질 것만 같아 정국이 눈을 꾹 감았다. 지민은 장난이라며 다시 정국의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주며 정국의 목덜미에 파묻은 얼굴을 들었다.

 

 

 

"무섭지."

 

 

 

붉어진 눈을 원래대로 돌리며 지민이 정국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정국은 반쯤 풀린 눈으로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얼굴이 아까보다 더 뜨거워진 것 같다. 심장은 아까보다 더 세차게 뛰었다. 형만 보면 설레는 기분이 뱀파이어를 봐서 그런 게 아니었나봐요. 정국은 지금까지 지민에게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지민의 차가운 손을 뜨거운 손으로 잡고서는 지민의 이름을 나직하게 부르다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정국이 눈을 떴을 때 지민은 이미 집에 가고 없었다.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정국은 핸드폰을 켰다. 잠 들어서 먼저 간다, 나중에 봐~ 지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천천히 스며들던 지민이 결국 정국의 심장에 전부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정국은 핸드폰을 껴안다가 조심스레 입을 맞추며 어제 못 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약속했던 100일의 절반이 지나갔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정국은 지민과 근사한 데이트를 하고 싶은데 옷을 도무지 못 고르겠어서 패션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정국은 유일한 친구인 태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 이상한 귀신 얘기 할 거면 끊어라."

 

"아 잠깐만! 그거 아니고 옷 좀 골라달라고!"

 

"뭐? 흰 무지티만 10벌 있는 애가 옷을 골라달라니 내일은 해가 동쪽에서 뜨려나?"

 

"해는 원래 동쪽에서 떠."

 

 

 

정국은 태형에게 자신이 요즘 잘 보이고 싶은 좋아하는 상대가 있는데 데이트 할 때 옷을 어떻게 입을 지 질문을 했다. 태형은 정국이 좋아하는 상대가 있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펄쩍 뛰었다. 뭐어?! 태형의 반응에 정국은 귀가 아파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그 좋아하는 상대가... 처녀귀신이거나.. 암튼.. 그런 쪽은 아니지..?"

 

 

 

태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뱀파이어니까 그런 쪽이 맞긴 한데.. 굳이 태형에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남자야. 남자라는 말에 태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귀신보단 남자가 낫지! 편견 없는 태형은 정국에게 너랑 어울릴만한 옷을 골라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정국은 전화를 끊고나서 데이트코스를 검색했다. 일반적인 건 영화를 보고 레스토랑에 가서 근사한 식사를 한 다음에 길거리를 거닐거나 아니면 모..텔........ 정국은 창을 껐다. 모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선 영화 예매창에 들어갔다. 요즘 흥행하는 영화.. 딸깍딸깍, 마우스를 움직여 가장 예매율이 좋은 영화를 차례대로 봤다. 볼 만한 게 없다고 생각할 때 쯤 하위권에 '뱀파이어의 발칙한 비밀'이란 제목의 영화가 나왔다. 뱀파이어! 뱀파이어란 단어에 홀린 정국은 줄거리를 읽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예매를 끝냈다. 정국은 뿌듯한 마음으로 맛이 좋다는 레스토랑까지 사전조사를 마치고 노트북을 닫았다. 어서 빨리 데이트 날이 왔으면 좋겠다.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정국은 태형이 골라준 대로 아이보리 목폴라 니트에 그레이 슬랙스, 깔끔한 베이직 브라운 코트를 입었다. 태형의 어드바이스에 맞춰 마스코트 같던 동그란 안경도 벗고 렌즈를 꼈다. 꾸민 게 아직은 낯설어 정국은 계속 옷을 만지작거리다가 마지막으로 태형이 추천한 향수까지 뿌렸다. 상쾌한 향이 정국의 코에 감돌았다.

 

약속장소로 나가니 지민이 먼저 정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국은 강아지처럼 지민에게 달려가 손을 꼭 잡았다.원래도 차가운 손이었지만 바람에 더 차게 식어있었다. 정국은 지민의 손을 주물거렸다. 지민은 정국의 차림을 훑고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해동되는 떡처럼 사르르 녹아내릴 듯이 웃었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방금 왔어."

 

 

 

진짜요?.. 정국은 믿지 못 하겠단 눈으로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곤 정국이 더 말을 덧붙이기 전에 빠르게 말을 가로 챘다.

 

 

 

"오늘 뭐 할 거야?"

 

 

 

덜 추워지라고 계속해서 지민의 손을 주무르던 정국이 지민의 말에 정국이 데이트 코스를 좔좔 읊었다. 오늘은 영화를 보고 밥 먹을 거예요! 그 후엔..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그냥 걸어도 좋은데. 이런 추운 날씨에는 무린가. 지민이 아까보단 덜 차가워진 손으로 정국의 손을 꼭 잡았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정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근처에 있던 영화관으로 지민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영화관에선 팝콘이 튀겨지는 냄새가 풍겼다. 역시 영화는 팝콘과 콜라죠. 정국은 계산대에서 팝콘과 콜라를 샀다. 콜라를 받아들고 피를 채워줘야 잠깐 고민했지만 지민이 얼른 가자고 눈짓을 줘서 안으로 들어갔다. 정국은 영화관 안을 둘러봤다. 영화가 시작하기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영화야?"

 

"이거.. 뱀파이어의 발칙한 비밀이요."

 

 

 

그거 평점 개쓰레기던데.. 지민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뱀파이어 좋아하는 구나. 보나마나 뱀파이어가 나와서 골랐을 정국을 생각하곤 지민은 찌푸린 인상을 피고 작게 웃었다. 곧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 됐다.

 

 

 

영화는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전개로 나갔다. 뱀파이어가 나와 인간을 사냥하다가 피를 빨리는 인간과 눈이 마주치고 그대로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엔딩은 서로 사랑을 속삭이며 섹스를 하다가 뱀파이어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인간 애인의 목덜미에 자신의 송곳니를 꽂고 피를 쭉쭉 빨아들이는데 조절을 못 한 나머지 인간이 죽는 내용이었다. 대체 제목과 연관성이 어딨는 건데?

 

 

 

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 정국은 황당한 표정이 됐. 이게 진짜 엔딩이야? 자기가 봐도 개구린 영환데 뱀파이어 당사자인 지민이 보면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정국은 슬쩍 지민을 봤다. 의외로 지민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지민은 작게 하품을 하며 정국에게 나가자고 했다. 정국은 얼마 먹지 못 한 팝콘통과 콜라를 들고 먼저 일어선 지민을 따라나갔다. 오늘 진짜 제대로 작정하고 나왔는데.. 첫 단추부터 잘못 꿴 느낌이 들었다.

 

 

 

지민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인간들이 상상하는 뱀파이어는 참 무궁무진하구나.. 오히려 더 당황한 정국이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게 귀여워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정국은 헛기침을 하고 근처 쓰레기통에 팝콘과 콜라를 버린 다음에 지민의 손을 잡고 미리 봐두었던 레스토랑을 갔다.

 

인기 있는 레스토랑은 크리스마스라 사람이 꽉 차있었다. 예약을 안 하셔서 이용이 어려우세요, 손님. 종업원의 말에 정국은 터덜터덜 힘없이 레스토랑을 나왔다. 오늘 진짜 데이트 제대로 하려고 했는데.. 정국은 왠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됐다. 근처 아무 음식점이나 갈까 생각해봤지만 사람이 넘쳐나는 날이라 어디를 가도 쉽게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정국의 표정을 살피던 지민은 정국의 손을 먼저 잡았다.

 

 

 

"너네 집 가자."

 

 

 

그렇게 둘은 정국의 집으로 이동했다. 길을 걷는 내내 여자들이 정국의 훤칠한 외모를 보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림. 그러고보니 오늘 진짜 멋있게 입었네.. 평소에 후줄근한 모습만 보다가 각잡고 멋지게 꾸민 모습을 보니 괜히 설레는 것 같았다. 아무 말 없는 지민을 의식했는 지 정국은 어두운 표정으로 연신 죄송하다고 말을 함. 오늘따라 왜이리 귀엽지. 지민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취방에 들어가자 정국이 보일러를 틀었다. 둘은 겉옷을 벗으며 나란히 침대에 걸터 앉았다. 정적이 맴돌았다. 뭐라도 시킬까요? 정국의 말에 지민이 치킨이라도 먹자며 말을 했다. 치킨을 주문한 정국은 지민에게 한시간 쯤 걸린대요. 하고 말을 전했다. 바쁜가 보다, 그치? 지민이 썰렁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말을 건넸지만 이미 침울해진 정국은 네에.. 하고 우울하게 대답을 했다. 지민은 화제를 바꿨다.

 

 

 

"넌 좋아했던 사람 없었어?"

 

 

 

 

 

 

 

 

 

"형은 연애 해본 적 있어요?"

 

 

 

지민은 과거를 회상했다. 몸과 마음 다 줬는데 뱀파이어 헌터한테 돈을 받고 제 거주지를 불은 나쁜 새끼. 이제 얼굴도 가물가물한 남자를 떠올리다가 머리를 쓸어넘기고 잠시 화를 식혔다. 마지막 연애가 5년 전이었던가..

 

 

 

"많지."

 

"제일 최근은요?"

 

"...5년 전이었던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 최악이었거든. 날 배신하고 떠났어. 지민의 말에 정국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점점 얼어붙는 분위기에 지민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 할 때 정국이 지민 앞으로 훅 다가와 지민의 손을 잡음. 자신의 얼굴 앞에 정국의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지민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낌.

 

 

 

"저는.."

 

"응?"

 

"저는.. 지민이 형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요."

 

 

 

무슨 소리야? 지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국이 키스할 것처럼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서로의 코 끝이 부딪히자 지민이 눈을 감고 숨을 참았다. 정국의 숨결이 느껴졌다.

 

 

 

"절대 배신하지 않아요."

 

"..."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국의 말이 지민에게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카톡으로만 보다가 처음으로 듣는 사랑이란 울림은 지민의 마음을 적시기 충분했다. 정국은 지민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지민은 감은 눈을 슬며시 떠 정국을 바라봤다. 정국은 이제까지 봤던 모든 모습중에 가장 진지한 모습으로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민은 심장께가 미친듯이 간질거림을 느꼈다.

 

 

 

 

 

*

 

 

 

 

 

아직 모르겠어, 정국아. 100일만 더 하자. 또 100일만. 지민은 이대로 정국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 계속해 계약연애를 연장시켰음. 이미 지민이를 좋아하는 정국이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지민을 챙겼다.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생각하면서도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것처럼 지민이는 정국이에게 빠져버렸다. 매일마다 오는 사랑한다는 말. 자신을 볼 때면 꿀이 떨어지는 것 같은 시선. 멈춰있는 지민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것 같았다. 둘의 감정이 더욱 짙어져 갔다.

 

 

 

조금만 더, 1년 채울까? 지민의 말에 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 중 하나가 먼저 사귀자고 말 하면 계약 연애가 아닌 진짜 연애가 되겠지만 둘은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정국은 지민이 도망갈까봐, 지민은 받아주고 난 후 자신이 또 상처받을 일이 생길까봐.

 

 

 

 

 

벌써 할로윈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지민은 정국과의 첫만남을 생각하며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벌써부터 가게들은 곳곳마다 할로윈 장식으로 귀엽게 꾸며져있었다. 그런 것들을 구경하던 지민은 푸스스 웃으면서 이번 할로윈엔 정국과 무얼할까 생각했다. 정국이 방에 귀엽게 호박들로 꾸미고.. 케이크도 사고.. 치킨도 먹어야지! 생각만해도 기분이 좋아져 웃는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던 지민은 앞에 사람이 있는 걸 못 보고 그대로 남자의 등에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지민은 아픈 제 코를 쓰다듬으며 꾸벅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다. 정신 좀 차리고 다닐 걸.. 앞에 남자는 지민이 부딪혔는데도 아무 말도 없었다. 지민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지민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비죽 웃었다. 아, 박지민? 살아있었네.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에 지민은 발이 땅이라도 박힌 듯 옴짝달싹을 못 했다. 한 때 지민이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말랑하게 녹여져 있던 심장이 얼어붙어 딱딱해지는 듯 했다. 배신자 새끼.. 지민의 말에 남자가 크게 웃었다. 배신자라니 지민아. 어떤 인간이건 그 상황에선 너 대신 돈을 택했을 걸? 넌 인간한텐 절대 사랑받지 못 해. 남자의 말이 지민의 몸에 꽂히는 듯 했다. 지민은 부들부들 떨다가 손을 들어 남자의 명치를 가격했다. 남자가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드는 걸 보자 지민은 방향을 틀어 사람들을 헤치고 뛰어갔다. 툭, 투둑. 지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림.

 

 

 

 

 

집에 들어와 지민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엉엉 울었다. 이 상황에서 집에 남준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지민의 머릿 속에 아까 마지막 남자의 목소리가 웽웽 돌았다. 넌 인간한테 절대 사랑받지 못 해.. 정국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전화를 걸 수도, 찾아갈 수도 없었다. 지민의 트라우마가 너무 심하게 자극 되었다. 정국이도 나중에 이렇게 될 바에야 아예 지금 끊어야 겠다.. 극단적인 생각을 한 지민은 타자를 하나 씩 칠 때마다 손을 덜덜 떨었다. 카톡을 남긴 지민은 확인하지도 않고 폰을 던져버리고 다시 아이처럼 울었다.

 

 

 

 

 

[그만 하자.]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정국이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고 지민이 보낸 카톡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정국은 바로 지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지민은 받지 않았다. 형, 무슨 일이에요.. 카톡을 보내봐도 지민은 읽지 않았다. 정국은 마음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자신이 잘못 한 게 있나 생각해봐도 전혀 감이 하나도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 지민을 보낼 수는 없어 정국은 집을 나서서 지민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과 지민이 처음 만났던 길거리. 그 곳이라면 있지 않을까. 정국은 겉옷도 입지 않고 얇은 흰 티만 입은 채로 추운 밤거리를 뛰어 다녔다.

 

하지만 은색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정국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었다. 얇게 입고 나왔어도 계속 뛰어서 그런 지 땀이 줄줄 났다. 사람들은 지금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정국이를 한 번 씩 쳐다보고 지나갔다. 어딘가 단서가 있지 않을까.. 정국은 미친 사람처럼 눈을 굴리며 지민의 실마리를 찾아갔다.

 

 

 

"야, 나 아까 걔 만났다."

 

"누구?"

 

"그 있잖아, 5년 전에 내가 잠깐 가지고 놀던 애."

 

"아~ 박지민? 근데 왜?"

 

 

 

정국은 자신을 지나치던 남자들의 입에서 지민의 이름이 나오자 반사적으로 둘을 돌아봤다. 박지민이란 이름은 흔하니 자기가 아는 박지민이 아닐 지도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귀가 기울여졌다.

 

 

 

"아까 여기서 만났는데 내 명치 치고 도망 가더라?"

 

"갑자기?"

 

"아니, 내가 반가운 마음에 몇 마디 해줬지."

 

 

 

걔 뱀파이어라고 컨셉질 했잖아. 빵떡 같이 생겨같곤. 착하게 그 컨셉에 맞춰 인간한테 절대 사랑받지 못 할 거라 해줬지. 남자가 낄낄거리며 모험담을 들려주듯 말 했다. 정국은 자신이 들은 말을 조합해봤다. 뱀파이어, 빵떡, 5년 전. 정국은 이 질 나쁜 남자가 지민이 사랑했던 5년 전 애인이었다는 걸 확신 했다. 그 생각을 끝마치자마자 별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주먹이 먼저 나가서 그 남자를 가격했다.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쓰러져 정국을 보다가 화난 표정으로 씩씩 거렸다.

 

 

 

"뭐야, 미친 새끼야!"

 

 

 

정국은 남자를 죽일듯이 노려봤다. 이딴 새끼 때문에 지민이 형이.. 남자가 일어나서 정국이를 때리려 손을 올렸다. 남자의 옆에 있던 친구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꿈뻑거리며 둘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남자가 손을 내려 정국을 때리려 할 때 정국은 남자의 손을 잡아 막고는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박지민 함부로 말 하지마."

 

"뭔데? 아~ 이번에 박지민이 만나는 놈이 너냐?"

 

"더러운 입으로 부르지 말라고."

"너도 어차피 뱀파이어 헌터한테 꼰지를 거 아냐? 그거 돈 두둑하게 주는데."

 

 

 

남자가 히죽거리며 정국을 비웃었다. 정국은 눈이 뒤집힌다는 게 어떤 뜻인 지 처음으로 느꼈다. 이성으로 겨우 버티며 남자의 멱살을 잡아채며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주위엔 어느 새 사람들이 몰려 둘의 싸움을 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걔가 버리긴 좀 아깝지. 대달라하면 바로 대주ㄱ.."

 

 

 

이번엔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국의 주먹이 남자의 얼굴에 꽂혔다.

 

 

 

-

 

 

 

다음 날 저녁 남준이 급하게 헐레벌떡 뛰어와서 지민에게 영상을 보여줬다. 지민아 이거 그때 네... 크흠, 그리고 정국이 아냐? 지민은 정국이란 말에 몸을 흠칫 떨다가 겨우 영상을 봤다. 영상 속에서 전남친과 싸우고 있는 정국의 모습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둘이 어쩌다 마주친 건지는 몰라도 자신으로 인해 싸운 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정국의 얼굴을 보자 사무치게 그리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정국에게 카톡이 왔다.

 

 

 

[보고 싶어요, 지민이 형.]

 

 

 

지민은 카톡을 받자마자 마음 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대로 집 밖으로 나가 정국의 자취방으로 뛰었다. 정국과 처음 만났던 거리는 할로윈 데이라고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다. 지민은 뛰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정국과 손등이 스쳤던 곳에서 잠깐동안 서서 1년 전을 회상했다. 그땐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이 될 줄은 몰랐는데. 지민은 주먹을 꼭 쥐고는 다시 정국의 자취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상 도착하니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 지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있었다. 폰은 두고왔고 그렇다고 정국의 집 문을 두드리는 건 조금 무서웠다. 지민은 고개를 들어 정국의 방 창문을 쳐다봤다. 정국의 방은 불이 꺼져있었다. 잠이 들었나. 지민은 서성거리면서 계속 창문을 바라봤다.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으니 텔레파시라도 통한 건 지 정국이 창문을 닫으려 창문앞에 서있었다. 정국은 창문을 닫다가 가로등 쪽에 사람이 서있는 걸 보고 고개를 내렸다.

 

 

 

정국과 지민의 눈이 마주쳤다. 정국은 눈을 크게 뜨다가 눈을 한 번 부볐다. 기다려요. 입모양으로 말하며 정국은 창문 앞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정국은 지민의 앞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고요한 골목에는 정국과 지민과 고장 나 깜빡거리는 가로등 뿐이었다. 지민은 눈앞에 있는 정국을 보자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이번에 먼저 입을 연 건 정국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진짜.."

 

"..."

 

"갑자기 그만하자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 지 알아요?"

 

 

 

정국이 말을 할 때마다 지민은 가슴이 콕콕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국이 지민의 고개를 들어올리곤 자신을 쳐다보게 했다. 그리곤 지금까지 떠날까봐 무서워 말 하지 못 했던 진심을 처음으로 꺼냈다.

 

 

 

"지민이 형, 사랑해요."

 

"평생 사랑해줄 것도 아니면서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매일마다 듣는 말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비뚤게 들림. 지민이 울먹이는 목소리를 숨기려 킁, 소리를 내며 코를 먹으며 말 했다. 겨우 만나러 와서 처음 하는 소리가 이거라니. 지민은 자신을 자책했지만 이미 튀어나간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전 평생 사랑하겠단 마음으로 말하는 건데요."

 

"..."

 

"형이 뱀파이어가 아니라 인간이었어도 사랑했을 거예요."

 

 

 

정국은 지민의 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쪽으로 가져다댔다. 아직까지 팔팔하게 뛰는 심장은 지민의 손이 닿자 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민은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지민의 얼굴을 보던 정국은 자신도 손을 들어 지민의 심장부근을 눌렀다. 미동도 없는 심장이 느껴졌다. 정국은 손을 내리고 자신의 심장을 지민이 더 느낄 수 있게 지민을 틈도 없이 꽉 안았다.

 

 

 

"형이 원하기 전까진 인간으로 살게요."

 

"..."

 

"뱀파이어가 되기 전까진 형 몫만큼 더 심장을 뛰게 할게요."

 

 

 

들리죠? 지금도 더 커져가는데. 정국의 말처럼 심장은 지민과 가까워지자 더욱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지민은 제 가슴에 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고 자신의 심장이 피를 통하게 하려 펌프질을 한다는 착각까지 할 정도였다. 정국은 품에서 지민을 떨어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지민의 입술을 쓸었다. 차가웠다.

 

 

 

"형이 뜨겁다고 느낄 정도로 제 온도를 나눠줄게요."

 

"..."

 

"그리고 그 다음은, 같은 온도가 돼 봐요."

 

 

 

지민의 눈이 깜빡였다. 정국은 지민의 손에 깍지를 끼고 손등에 입 맞췄다. 정국이 입 맞추는 대로 열이 확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지민은 안경을 끼지 않은 정국의 맑은 눈을 바라봤다. 정국의 눈에선 진심이 가득 담긴 열기가 뚝뚝 흘러넘쳐 화상을 입는 것만 같았다.

 

 

 

"평생 함께 하고 싶어요."

 

 

 

정국의 끓는 듯한 목소리가 지민의 귀에 꽂혔다. 정국이는 지민의 답변을 기다리며 초조한 눈빛을 보냈다.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고 그저 자신이 느낀 감정을 투명하게 말해주는 정국이가 지민의 심장을 간질였다. 이 남자라면, 진짜 자신을 평생 행복하게 해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달싹거리던 지민의 입술이 열렸다.

 

 

 

"내가 널 사랑해야 네가 뱀파이어가 된다는 거 알고있지."

 

"네."

 

"그게 언제가 될 지 몰라. 몇 년이 될 지, 몇 십 년이 될 지."

 

"상관 없어요. 몇 십 년이 지나도 저는 형을 사랑할거예요."

 

 

 

정국의 목소리가 조용한 거리에 울렸다.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한 쪽은 모든 것을 녹일 듯한 뜨거운 시선이었고, 한 쪽은 떨리는 시선이었다. 정국의 시선을 받아들이던 지민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아, 못 이기겠다. 지금도 이렇게 설레는데 어떻게 참아. 지민은 굳어있던 표정을 펴고 정국에게 다가갔다. 그럼 평생 사랑해줘. 지민이 발꿈치를 살짝 들어올리곤 정국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차가운 입술이었지만 왠지 뜨겁게 느껴졌다. 둘의 온도가 섞였다.

 

 

 

둘을 비추는 보름달은 오늘도 시리도록 푸르고 아늑했다.

 

 

 

1년만에 돌아온 10월 31일, 할로윈의 밤.

 

둘의 사랑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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