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e, saw
다소 (뭅) 作
"너 전정국 맞지?“
맑은 미성의 목소리가 정수리에 닿았다. 이 학교에서 내 이름이 불린 게 출석체크 말곤 처음이라 어깨에 잔뜩 긴장감을 묻히고선 목소리의 주인공을 올려다보았다. 낮은 강의실 의자 책상에 단풍잎 같은 손을 올려놓고서 날 내려보던
"난 박지민.“
박지민은 내 짝사랑 상대였다.
"얼굴이 잘 안 보여서, 너 전정국 맞지?"
"...맞아."
"아- 다행이다. 모르는 사람한테 아는 척했는데 아니면 쪽팔리잖아.“
뭐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에 다시 시선을 던졌다. 얼굴이 잘 안 보이는 게 당연하다. 나는 얼굴의 반을 가리는 검은색 벙거지를 최대한 눌러썼고, 검은색 마스크를 코까지 덮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내 얼굴을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아 넣고 모른 척 길을 간다.
내 얼굴은 흉측하니까,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게 항상 피해다녔다.
"너 혹시 동아리 어디 들었어?"
"안 들었어."
"진짜? 그럼 우리 동아리 들어올래? 완전 좋아.“
딱히 끌리진 않았다. 우리 학교 우리 과 최대 인싸 핵인싸 박지민이 있는 동아리라면 시끄러운 걸로 1등하고도 남을 동아리일 테니까. 나는 사람 많고 시끄럽고 더군다나 이런 박지민 옆 같은 곳은 피해야 했다.
"들어오면 안 돼? 사진 동아린데 하는 거 없어. 그냥 폰으로 사진 몇 장찍고 영화 보고 노래방 가."
"나 사진 싫어해."
"어? 아닌데. 너 사진 좋아하잖아.“
벙거지를 살짝 들어 박지민을 쳐다보았다. 눈길이 닿고 박지민은 놀란 기색 없이 머리만 긁적인다. 처음이었다. 내 눈을 보고도, 내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사람은. 나는 괜히 오른쪽 얼굴이 가려워서 마른 손바닥으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다시 벙거지를 꾹 눌러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학식 먹고 맨날 예술관 앞에서 사진 찍잖아. 그거 너 아닌가? 아닌데- 양송이 너 맞는데."
"양송이?"
"응. 너 별명. 내가 지었어, 어때?"
"내가 왜 양송인데?"
"맨날 이 모자 쓰고 다니잖아. 버섯 같아. 색이 검은색이라 약간 독버섯?“
독버섯... 괜히 중얼거렸다.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도 신기한데 날 매일 봤다고 한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한참을 갸웃거리던 박지민이 슬금슬금 내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앉으면서 강의실 의자 어떤 새끼가 이렇게 만들었는지 정신병원 가야 한다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조금 시끄러웠고, 조금 웃겼다.
마스크 안에서 소리 없이 웃는데 갑자기 박지민 손이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만지고 있던 핸드폰을 가져간 박지민은 친히 자기 번호를 꾹꾹 눌러 저장시켰다. 당황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순식간에 동기들이 들이닥쳤다. 그러고 보니 저 중에서 90%는 박지민과 친할 텐데.
"전공 끝나고 동방가자. 신청서 줄게."
"나 한다고 한 적 없는데."
"할 거 잖아."
"너 친구 많잖아."
"지민이형!“
친구 많잖냐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뒤쪽에서 박지민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박지민이 '잠만 잠만!'하고 소리치자 이젠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쟤 아수라백작 아니야?' '지민이 형이 왜 쟤 옆에 있지?' 등등. 차라리 귀라도 어두웠으면 좋을 텐데, 쓸 데 없이 나는 귀가 좋아서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박지민을 향해 돌아보았다.
"야. 가."
"엉?"
"시끄러우니까 저리 가라고."
"알았어. 이따 끝나고 동방 갈 거지?"
"몰라. 가."
"동방 간다고 약속하면 갈게.“
어깨부터 허리선까지 쭉 내려오는 곧은 등이 빳빳하게 굳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몸을 잔뜩 움츠리다가 황급히 가방을 들었다. 당황한 박지민의 눈동자가 따라붙었고 순식간에 강의실엔 적막이 감돌았다.
"정국아“
누가 불러준 적 없는 내 이름이, 내가 좋아하는 애의 입에서 나왔을 때 온몸엔 소름이 오소소 돋고 머리털은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다. 고요한 강의실에 박지민이 부른 내 이름이 통째로 가득 찼고 나는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
아버지는 항상 술을 마시고 들어오거나, 여자 만나러 나가거나 이 둘 중 하나였다. 어느 날 깨진 소주 병으로 어머니를 협박해서 돈이란 돈은 다 쓸어가더니 기어코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 위에 돈을 흘려 주우러 뛰어들어선 유명을 달리하셨다.
어머니는 사망보험금엔 손도 대지 못하셨다. 미련했다.
결국 빚을 갚기 힘들어지자 원래 살던 집을 내놓고 달동네로 이사를 갔다.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집에서 어머니와 나는 도란도란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렸고, 어머니는 아팠다.
중학생이 되자 학원이 다니고 싶어졌다. 그맘때 처음으로 여자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여자친구는 나더러 학원을 같이 다니자고 말했다. 분명 돈이 없다고 하실 어머니가 눈에 훤했지만 나는 돈이 없어 다닐 수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만약 돈 때문에 안된다고 하면 아버지 사망보험금으로 다니게 해달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어머니 저 학원 다니고 싶어요.'
'학원? 어쩌니 돈이 없는데...'
'다니게 해주면 안 돼요? 아버지 사망보험금도 있고... 여자친구가 꼭 같이 다니고 싶다고 했어요.'
'여자친구?‘
어머니의 마른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뭐에 홀린 것처럼 서랍장으로 기어간 어머니는 구석에 처박아놓은 통장을 품에 끌어안고선 나에게 말했다. 아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들, 아들은 착한 아들이지? 아들은 아빠처럼 안 될 거지?‘
나는 쇠망치로 뒤통수를 한대 꽝 얻어맞은 듯 얼얼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손을 벌벌 떨며 장롱 옆 방구석을 향해 무릎으로 기어갔다.
'어머니...?'
'아들은 착한 아들이 돼야 해. 아들은 엄마랑... 엄마랑 오래오래 같이 살아야 돼. 착한 아들. 내 아들. 내 것.‘
꽤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아프다는 것을 알아버린 나는 충격에 휩쌓였다. 학교도 가지 못했다. 여자친구한테 말할 변명거리가 없었고, 어머니가 '여자친구'라는 게 나를 제게서 빼앗아간다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아들은 엄마 꺼야. 착한 아들, 내 아들. 아빠처럼 되면 안 돼. 엄마 안 버릴 거지?‘
***
침침 [정국아 나 박지민이야]
울릴 일이 가히 드문 내 핸드폰이 어둠 속에서 발악하며 빛을 쏟아내었다. 잠귀도 밝고 예민한 편에 속하는 나는 급격하게 눈꺼풀 위로 내리쬐는 빛에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침대 옆 협탁으로 고갤 돌리자 뒤쪽에 놓인 거울로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흉측한 내 오른쪽 얼굴이 베개에 뭉개지듯 가려졌다. 멀끔한 왼쪽 얼굴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폰이 빛을 먹어버리고 방 안이 다시 깜깜한 어둠 속으로 잠식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고, 다시 우웅- 하는 진동소리와 함께 빛으로 환히 물들었다.
침침 [벌써 자? 내일 너 공강이지?]
핸드폰의 밝기를 최대로 낮추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지민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할지 몰라 엄지를 자판에 올려두고 멍하니 있는 와중, 우웅- 세 번째 답장이 도착했다.
침침 [내 번호 저장행]
침침 [아 맞아 암튼 낼 공강 맞지? 자는 거 같네... 어카지]
. [나 안자]
침침 [헐 다행쓰! 그 가입 신청서 내일 줄게. 내일 바로 내야 하는데 너 안 오니까... 혹시 학교로 올 수 있어?]
동아리 가입한다고 안 했는데. 코를 손가락 끝으로 긁적였다. 묘하게 지민은 문자도 시끄러웠다.
침침 [내일 세시까지 예술관 앞으로 와줭 땡큐 아리가또~~]
안 한다고 답장을 보내려 하던 찰나 또 다른 문자가 도착했다. 수강신청할 때 겨우 성공한 목금 공강에 꿀같은 공강에 학교까지 오라고 하는 못된 박지민.
. [오후 세시?]
침침 [ㅇㅇ 그럼 새벽이게?]
아. 멍청한 소리를 입 밖으로 뱉고선 고갤 끄덕였다. 박지민이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해서 목뒤를 챱챱 두드렸다.
침침 [아 그리고]
침침 [나 너보다 형이다]
침침 [두살이나]
침침 [나 삼수했거든]
연달아 도착하는 문자폭탄에 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문자가 또 도착했다.
침침 [지민이 형이라고 불러라 애기 양송이]
그 문자를 끝으로 핸드폰은 조용해졌다. 허전한 마음에 괜히 문자함을 들어갔다가 나오고, 하지도 않는 박지민 에스엔에스를 들어갔다 와 보고, 주고받은 문자를 쭉 올려 다시 내려보기를 반복하던 찰나
"아 미쳤나 봐...“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민이 형- 하고 부르면 지민이 '정국아- 애기 양송이-'하는 상상만 했는데도 이렇게 반응이 솔직하게 와버리다니. 자괴감에 빠져버려서 베개에 얼굴을 쾅쾅 찍어버렸다. 무지하게 설렜다.
***
어머니의 병을 알고 난 후, 내가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어머니가 알고 난 후. 급격히 어머니는 건강이 나빠졌다. 대문 앞에 쓰레기를 버리려 발에 슬리퍼를 꿰어신으면 어머니의 따가운 눈초리가 닿아왔다. 달랑달랑 쓰레기를 들어 보이고 현관문과 대문을 활짝 열고선 도망 가지 않는다, 어디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나서야 어머니는 편히 몸을 뉘었다.
그런 끔찍하지만 안쓰러운 생활을 꼬박 삼 년간 반복했다.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고 어머니는 이제 집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날, 나를 찾아온 중학교 친구들이 하루 종일 집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날. 그날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렸고 밤은 기울어가고 친구들은 언덕 아래에서 비를 꼬박 맞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걱정되었다. 잠든 어머니의 얼굴 위로 손바닥을 휘이 저어 깊은 잠을 확인하고 운동화 뒤축을 구겨 신고 언덕을 뛰어내려갔다. 뒤늦게 어머니가 눈을 뒤집고 따라 뛰어내려오는 것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장대비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몰아쳤다.
'전정국!‘
친구들 네 명이 웬 차에서 우르르 내렸다. 알고 보니 나중에 온 한 친구가 아버지 차를 몰래 끌고 나온 것이라고 했다. 일단 비를 피해 차에 올라타는 순간 어머니가 운전석으로 뛰어들었다.
'정국아!‘
어머니는 어디서 나온 괴력인지, 친구들을 밀쳐내고선 운전석 문을 닫고 잠궈버렸다. 운전도 할 줄 모르시고 심지어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의 건강을 가진 어머니는 반쯤 미쳐있었던 것 같다.
묵직하게 엔진 소리를 내며 차가 빠르게 움직였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겠고 나는 물이 뚝뚝 흐르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어머니의 팔을 붙잡았다.
'어머니, 집에 가요.‘
'내 거야. 안 줘. 아무한테도 안 줘.‘
차는 속절없이 흔들리고 굉음을 내며 도로 위를 질주했다. 워낙 촌 동네여서 금세 절벽 비스름한 곳이 나왔다. 와이퍼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할 만큼의 비였다. 나는 어머니의 안전벨트를 채우려 손을 뻗었고 어머니는 그 순간 나를 돌아보았다. 커브길이었다.
'내 아들. 내 것.'
'어머니!'
'같이 가자. 같이 죽어버리자!!‘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에 죽음의 빛이 서렸다. 그길로 차는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쳤고 나는 초인의 힘으로 문을 열고 탈출했다.
그때, 오른쪽 얼굴이 아스팔트에 갈리며 흉이 잔뜩 생겨났다.
나는 아수라 백작이 되었다.
***
"얌“
볼캡을 꾹 눌러썼지만 그 밑으로 퉁실한 입술이 먼저 보였다. 지민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얼굴로 나에게 종이를 휙 넘겼다. 얼결에 받아들고 확인하니 동아리 가입 신청서였다.
"안 한다니까."
"안 할 거면 오늘 왜 나왔어?“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마스크에 가려져 안 보일 테지만.
"지금 작성해주라. 오늘까지 제출이라서.“
결국 지민이 건네는 볼펜을 받아들고 예술관 벤치에 종이를 올려놓고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름과 생년월일, 가입동의란에 싸인까지 꼭 하고나니 단숨에 종이를 앗아간다. 과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하품을 쩍쩍 하던 지민은 대뜸 정국의 팔을 붙잡았다.
"봄이라 졸리다, 그지."
"별로."
"해장하러 가자.“
물음표 잔뜩 띄운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알리가 없었다. 계속 하품만 하던 지민이 잡은 팔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벤치 위로는 벚꽃이 흩날렸다.
"가자“
속절없이 끌려가면서도 벚꽃 아래를 지났다. 굳이.
박지민은 먹자골목으로 들어가는 빠른 길을 내버려 두고 선 벚꽃길 아래로 나를 이끌었다. 굳이.
뭐라고 말을 걸지. 얼굴이 망가진 후로 한 번도 이렇게 또래와 마주 보고 밥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조금 긴장이 되었다. 국밥을 후후 불어 한입 떠먹고 으음- 하며 감탄하던 지민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 술을 넘 많이 마셨나...“
숟가락을 들고 멍하니 있는 나를 보다가 안 먹냐고 물어온다. 쓰고 있던 볼캡을 벗어서 가지런히 뒤로 넘겨진 머리 탓에 매끈한 이마가 훤히 보였다. 이마에 콕콕 자리한 점 세 개를 보다가 겨우 시선을 내려 국밥을 한입 먹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여기 맛있지? 나 이 학교 시험 보는 날마다 여기 와서 국밥 먹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눈만 도록 도록 굴리다가 깍두기를 집어먹었다. 턱으로 내린 마스크가, 입을 움직일 때마다 걸리적거렸다.
"안 더워? 너 여름에도 그러고 다녀?“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데, 왜 이리 말을 많이 거는 걸까. 동정일까. 연민일까.
"여름엔 색이라도 바꿔봐. 흰색으루. 검은색은 너무 더워 보인다.“
오지랖도 넓네. 말만 많은 게 아니라.
"이거 먹고 저 건너편 가서 아이스크림 먹자.“
그런 점이 매력이긴 하다.
대답 없는 나를 잠시간 쳐다보던 지민이 남은 국밥을 깨끗이 비웠다. 나는 반 이상을 남겼고 지민이 지갑을 들고 일어나는 걸 보았다. 봤어도 모른 척했다.
"오늘은 내가 먹자고 했으니까 내가 낼게."
"내가 낼게."
"됐거덩. 공강 날에 부른 건데, 미안해서 안 돼."
"그래도"
"다음에 정국이 니가 내. 그럼 됐지?"
"... 알았어.“
이런 상황을 기대하고.
"지금 단톡 초대해야겠다."
"단톡?"
"응. 동아리.“
마주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던 와중 지민이 핸드폰을 꼼질거리며 꺼내기 시작했다. 과잠 주머니가 깊은 편인데 잘 안 나오는지 한참을 골똘한 표정으로 꼼지락거렸다. 그 얼굴이 꽤 볼만해서 나도 스푼을 입에 물고 지민을 쳐다보았다.
앗, 여깄다.
지민이 핸드폰을 찾아 꺼내며 테이블에 물건을 와르르 올려놓았다. 엉킨 이어폰과 립밤, 차 키. 이러니까 핸드폰을 못 꺼내지... 지민은 숨어있는 핸드폰을 골라 꺼낸 뒤에 아이스크림을 한 수저 퍼먹었다.
"어, 정리해주게?"
"이거 이렇게 하면 안 엉켜."
"나 그런 거 알려줘도 나중에 다시 못해."
"배우면 되잖아."
"자꾸 까먹어. 그냥 정국이 니가 맨날 해줭.“
아이스크림을 듬뿍 넣어서 발음이 뭉개지는 지민은, 얼굴도 뭉개듯이 웃으며 말했다. 자꾸 심장이 떨어지는 말만 하길래 조금 괘씸하기도 했다.
"울 동아리 친구들 다 착해. 다 너 좋아할걸?“
정리된 이어폰을 주머니에 넣던 지민이 또 웃었다. 저런 말을 하면서 저렇게 웃는 건 반칙 아닌가, 생각했다.
또 심장이 아파오는 것 같아서 괜히 시선을 피했다. 테이블에 아직 놓여있는 차 키에 해골 같은 게 달려있어서 살짝 건드려보니 키링이었다. 취향 참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지민은 뭔가 작고 귀여운 것들을 달고 다닐 줄 알았는데. 예를 들어 강아지나 고양이, 병아리, 아기 돈가스 같은 거.
"귀엽지“
그냥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딱히 귀엽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섭다거나 거부감이 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귀여운 편에 속하는 것 같아서 고개만 끄덕인 거다. 근데 고갤 끄덕인 나를 보고 박지민은 신난 표정으로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얘 이름 잭이구 이 쬐끄만 애는 제로야. 유령 강아지. 완전 귀엽지."
"유령 강아지?"
"응. 잭이 무덤 톡톡 치면 제로가 뿅 나타난다?"
"뿅 나타나는구나.“
길쭉한 눈매가 이렇게 동그래질 수가 있나. 지민의 눈만 쳐다보다가 문득 내가 지민의 말을 따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머쓱해져서 그냥 벙거지를 눌러쓰는데 지민이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귀가 뜨끈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서 그 안에 있는 감정들까지 들켜버린 것만 같아, 머릿속이 온통 엉켜버렸다.
"너 되게 나 귀여워하는 거 같아."
"ㅁ, 뭐?"
"그냐앙- 느낌이 그렇다구.“
팔을 쭉 뻗어 스트레칭 비스무리한 걸 하던 지민이 소지품들을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에 전공수업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말했다. 마스크를 올려 쓰면서 자리에서 같이 일어나 아이스크림 가게를 빠져나오는데 지민이 또 팔을 덥썩 잡아왔다. 그와 동시에 내 마음이 또 출렁거렸다.
"나중에 잭 나오는 영화 같이 볼래?"
"영화?"
"응. 크리스마스의 악몽."
"나 영화관 안 가."
"이거 옛날 영화라 영화관에서 지금 못 봐."
"그럼?"
"내 방에서 같이 보자.“
눈높이가 약간 낮은 지민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언뜻 초롱초롱하다고 느낄 정도의 눈빛을 보내기에 그냥 고갤 끄덕이면서 알았다고 말했다. 해사하게 웃어 보인 지민이 팔을 놓고 흔들어 안녕을 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고, 나도 모르게 같이 마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카톡 할게. 잘 가!“
손을 흔들며 뒷걸음치던 지민이 뒤돌아 학교 쪽으로 뛰어간다. 점점 작게 멀어지는 지민의 뒷모습을 보다가 뒤늦게 돌아서서 자취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꽤나 가벼웠다.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침침님이 .님을 초대했습니다.
김석진 [오 뉴페?]
침침 [전정국 (20) 국제비서과 1학년 재학중]
민윤기 [대리인이냐]
김석진 [스무살~~ 제이케이 프사는 없나]
연신 번쩍거리고 웅웅 거리는 핸드폰 탓에 다시 잠을 설쳤다. 결국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서 식탁 의자에 쭈그려 앉아서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단톡방에 초대되어있었다. 김석진 이란 사람이 프로필사진을 물어오는 걸 끝으로 다들 답장이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일단 인사부터 해야겠다 싶었다.
. [안녕하세]
. [요]
김석진 [굉장히 힙한 친구네 ㅋㅋ]
침침 [우리 정국이 존잘이라 프사해놓으면 큰일남요]
김석진 [나보다? 나보다 잘생김?]
침침 [말이라고]
다시 시작되는 릴레이 같은 카톡들을 보다가 맥주캔을 따서 한 모금 머금었다. 박지민은 참 신기하다. 사람이 무안하지 않게끔 적당히 시선을 끌고 적당히 돌아가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게 박지민의 매력이니까.
민윤기 [새내기라 모르는 거 투성이일 텐데 저런 형까지 내가 미안하다]
민윤기 [그리고 내일 시간 괜찮으면 환영회나 하지 뭐]
김석진 [내가 뭐가 어떤데 윤기야]
김석진 [민윤기 내가 뭐 어떠냐고]
김석진 [강퇴/민윤기]
침침 [환영회여? 형 근데 정국이 낼 공강]
민윤기 [그래? 그럼 쉬어야지]
화면을 켜놓고 있다가 문득 다시 봤더니 환영회 얘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목금 공강에 주말까지 껴서 원래 박지민을 일주일에 세 번밖에 못 보는데 오늘 목요일에 지민을 봤고, 잘하면 내일도 볼 수 있다. 일주일 내내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흔한 일이 아니라서 나는 허겁지겁 내일 만나도 괜찮다는 톡을 보냈다.
쭉 이어지는 쉴 틈 없는 카톡 행렬에 마치 눈도 도록 도록 굴러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가를 꾹꾹 누르면서 맥주를 마저 마시고 다시 침대에 누웠는데, 협탁 뒤쪽에 놓인 거울로 내 얼굴이 보였다.
일그러지다. 이런 말이 어울리는 얼굴이다. 아스팔트에 마구잡이로 갈린 얼굴은 흉측하게 뭉개졌고 내 삶도 단숨에 무너져내렸다. 순식간에 어머니를 잃고 17살 이란 나이에 고아가 된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 어머니는 사고사로 처리되었고 사망보험금이 나름 많이 나왔다. 아버지의 사망보험금과 합하니 어린 나에겐 아주 큰돈이었다.
침침 [정국아 자?]
. [아직]
침침 [내일 저녁 여덟시에 학교 앞 포차로 오면 돼. 근데 그전에 만날 수 있어?]
. [전에?]
침침 [ㅇㅇ웅 이어폰 줄 엉켰어]
침침 [오늘처럼 해줘]
침침 [그리고 밥도 사줘]
단톡 알림은 꺼져있었고 지민의 개인 톡이 도착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로 울려 퍼졌다. 아무렇지 않게 답장을 한다고 했는데 왠지 모르게 무뚝뚝해진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침침 [그리고 주말에 영화 보자]
다시 도착한 톡에 심장이 터질 듯이 운동을 하던 걸 마침내 멈추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발치까지 떨어졌다. 사람 참 설레게 한다.
. [응]
'ㅇ' 과 'ㅡ', 그리고 'ㅇ' 만 찍는데 왜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엄지손가락이 벌벌 떨리는 게 눈으로 보여서 더 당황해버렸다. 바로 읽어놓고 2분이나 지나고선 답장을 보내버렸다. 무려 '응' 한 글자를.
1은 사라지고 지민은 답장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답장이 왔으면 더 이어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테니까.
간만에 자기 전에 맥주를 마셔서 그런가, 괜스레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마음이 이리저리로 흔들렸다. 차고 넘치는 게 돈이었고 마침 내 얼굴을 수술해준다는 의사도 나타났다. 검정고시 합격과 동시에 수술일정을 잡았다. 올해 여름, 바다를 건너가서 수술을 받기로 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녀보고 싶었다. 예전에 잠깐 가져봤던 여자친구라는 것도 만들어보고 싶었고 엠티 가서 술도 진탕 마셔보고 싶었다. 물론 이 얼굴론 못하지만. 한학기 만이라도 욕심을 부려서 맞지도 않는 과에 들어갔는데 박지민을 봤다.
단숨에 빠져들었다.
맑은 얼굴, 깨끗한 얼굴. 얼굴처럼 그 속도 맑고 깨끗했다. 어느 누구나 좋아하고 어느 누구 싫어하는 사람 하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웅크리고 있지만 박지민은 나와 다르게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
어둠은 모든 걸 집어삼킨다. 얼굴에 그늘이 지고 나서부터 내 삶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술에 찌들어 폭력만 일삼던, 외도만 수없이 저지르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것부터 어둠이었을 것이다. 그 틈에서 살아남고자 아등바등했지만 어머니도 잃어버린 난, 도저히 어둠에서 나올 수 없었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기에,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기에 이렇게 끌리나 보다. 나는 도저히 저 빛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라서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서 이렇게 끌리나 보다. 닮고 싶어서.
말을 걸어보지도 못했다. 먼저 말을 걸어오고 내 이름을 알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막상 연락도 주고받게 되고 고작 한 학기만 다닐 학교에서 동아리까지 들어버리게 만드는 박지민이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이러다가 내가 새 삶을, 빛에서 거닐 삶을 포기하고 박지민 옆에 남아버리게 되면 어쩌나 싶었다. 무서웠다.
일곱시쯤 지민을 먼저 만났다. 전날 잠을 잘 못자선지 눈이 뻐근했다. 오늘은 조금 용기를 내서 얼굴 반을 덮어버리는 벙거지 대신에 볼캡을 쓰고 나왔다. 마스크는 물론 꼈고. 두근거렸다.
멀리서 걸어오는 지민은 유독 예뻤다. 빛이 났다. 한쪽 머리를 올려서 이마가 훤히 보였고 매끈한 얼굴 옆쪽에 붙은 귀에 귀걸이는 오늘 더 반짝거렸다. 빛이란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웃으며 다가와서 또 팔을 쥐는 지민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눈부셨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다행이다. 오늘 머리 망해서 다시 하느라 혼났어.“
죽는 소리를 내며 몸을 바짝 붙여오는 지민을 내려보았다.
"예쁜데."
"응?"
"못 들었으면 말아."
"아냐, 나 들었는데 또 듣고 싶어서 그런 거야. 또 해주면 안 돼?“
오늘은 볼캡을 썼다. 귀가 잘 보인다는 뜻이라니까.
"어? 귀가 빨개, 정국아."
"이어폰 줘."
"귀가 빨갛다니까? 정국아, 정국아."
"빨리.“
자꾸만 가까이 다가오며 웃는 지민의 숨소리가 귓가에 닿는 것 같았다. 그만큼 가까웠다. 몸을 뒤로 빼면서 손을 내밀었는데 연신 웃으며 장난치던 지민이 그 손을 덥썩 쥐었다. 흐읍- 하며 숨을 티나도록 들이쉬어 버렸다. 망했다. 다 망했어.
"가자. 술 마시기 전에 밥 먹어야지.“
그만 다가오라고 가슴팍에 팔로 엑스자를 그을 뻔했다. 하마터면 진짜 수술을 포기하고 이곳에 남고자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꽉 잡힌 손이 아직은 찬 바깥공기 탓에 발갛게 변해갔다. 조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지민이 이만큼 다가와 줬으니까 나도 다가가보기로 했다.
"따뜻하다."
"응"
"뭐 먹을래?"
"너 먹고 싶은 거.“
내 과잠 주머니에 폭 들어간 두 손이 노곤 노곤하게 풀려갔다. 더 이상 손이 시리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지만 우리는 손가락 하나하나 얽으며 틈도 안 남게끔 손을 잡았다. 벚꽃이 다 지면 더워질 텐데 더위가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위가 찾아오면 여름이 온 것일 테고 그러면 나는 여길 떠나야 하니까.
걱정하던 것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여기 이곳을, 지민을 두고 떠날 수 있을까.
동아리 환영회는 나름 괜찮은 시간이었다. 내 얼굴을 처음 보자마자 조금 굳어있던 형들은 이내 나를 보통사람 보듯이 봤다. 연기하는 게 아니고 정말 나를 평범하게 봤다.
민윤기 형은 실용음악과라고 했고 김석진 형은 모델과라고 했다. 사진 동아리 '찰칵' (이름은 구리다)의 원년 멤버라고 했다. 몇 몇의 신입생이 들어왔지만 다들 나가버리고 원년 멤버와 지민을 포함해 세 명만 남았는데 부원 네 명을 못 채우면 폐부 통보를 받고 전전긍긍하던 차라고 했다. 모두가 나와 나를 데리고 온 지민에게 소고기를 몰아주었다.
내 얼굴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맘 편히 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부원들은 하나같이 장난스럽고 시끄러웠지만 편안했다. 처음으로 시끄러운 틈에서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지민의 허벅지가 자꾸 닿아와서 곤란하기도 했지만 괜찮은 환영회였다. 동아리 들어와달라고 말해준 지민이 몹시도 예뻐 보일 정도로.
술을 진탕 마신 지민은 석진의 등에 업혀서 갔다. 내 자취방과는 반대쪽이라서 석진과 지민이 먼저 가고 윤기와 내가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지민이 조금 걱정됐는데 얼굴이 비쳤는지 윤기가 걱정 말라면서 편의점으로 이끌었다. 석진과 같은 원룸텔에 사니까 걱정 말라고 사족도 덧붙였다.
"혼자 사냐."
"네. 혼자."
"자취? 아니면 쭉 혼자?"
"... 쭉 혼자요.“
모든 걸 꿰뚫어볼 듯한 눈과는 다르게 초코우유에 꽂힌 빨대를 쫍쫍빠는게 꽤나 앙증맞았다. 잰걸음으로 걷는 윤기의 속도에 맞춰 걸으면서 과잠 안으로 손을 넣었다. 무언가 주머니 안에서 돌아다니기에 손으로 잡아채고선 다시 윤기의 말에 집중했다.
"박지민 정신없지."
"네? 아뇨. 괜찮아요."
"나도 처음엔 좀 귀찮고 그랬는데 걔 원래 그래."
"네..."
"아무한테나 그러진 않고.“
시무룩한 대답에서 내 마음을 읽은 건지 윤기가 뒷말을 이었다.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연신 손바닥 안에서 굴리며 장난쳤다. 분명 지민이 넣은 것일 거다.
"지민이가 학기 시작하자마자 동아리 들어와서 맨날 너 데려온다고 그랬는데."
"저요?"
"어. 양송이 데려올 거라고 기다리라고 그래서 언제 데려오나 했는데 한 달이나 걸리네.“
천하의 박지민이.
윤기는 뒷말을 삼키듯 뱉었다. 나는 다시 손안에서 무언가를 굴리면서 살포시 웃었다. 처음부터 날 알고 있었구나, 그 사실 하나로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다.
"허구헌 날 예술관 앞으로 뛰어가길래 뭐하나 했더니 너 보고 있더라고.“
신기했다. 학식을 조용히 먹고 소화시킬 겸, 사람들 눈 피할 겸 인적이 드문 예술관 앞 벤치에서 시간을 때우던 걸 지민이 보고 있었다니. 그래서 내가 사진 찍는 것도 다 알고 있었구나. 진짜로 매일 날 봤구나.
"지민이 안 그래 보여도 마음 되게 여리다."
"여릴 것 같아요."
"울리지 마."
"네?"
"울리지 마.“
걸음을 멈추고 덤덤하게 쳐다보며 단단한 말을 뱉는 윤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떠날 걸 아는 사람처럼 꼭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처럼 말한다. 심장이 따끔거리면서 잔뜩 찔려버렸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윤기의 뒤를 따랐고 그 후로 우린 말 없이 걷기만 했다. 내 자취방이 먼저 나왔고 윤기는 좀 더 가야 한다며 인사를 건넸다. 집으로 올라와 베란다로 나가 창밖에 저 멀리 걸어가는 윤기의 등에 대고 다짐처럼 말했다.
더 가까워지지 않을게요.
커다란 백팩을 옆에 내려놓으며 달뜬 숨을 작게 내뱉었다. 지금 내가 엉덩이를 대고 있는 게 지민의 침대라는 것이 퍽 웃긴 사실이었다. 쿵쿵 큰 소리를 내면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냉장고 앞에 서 있는 지민에게 들릴까 봐 가슴께 옷을 말아쥐었다. 좀 진정해 보라고 속으로 화도 냈다.
정말로 토요일이 되자마자 지민에게서 영화를 보자는 연락이 왔고 뒤이어 집 주소가 날아왔다. 그 톡에 한참을 정신 놓고 있다가 입에 파리 들어갈 뻔했다니까. 괜히 챙길 것도 없는데 가방을 큰 걸 들고 왔나 싶어서 옆에 놓인 가방을 손끝으로 톡톡 쳤다. 아, 다시 말하자면 가방에 매달린 것을 쳤다.
"어? 그거 달고 왔네?"
"주머니에 있길래."
"내가 진짜 아끼는 건데 준거야."
"그래도 돼?"
"응?"
"아끼는 건데 나 줘도 되냐고."
"아끼는 거니까 널 준 거지. 뭘 물어?“
천연덕스럽게 웃던 지민이 노트북과 병맥주를 들고 왔다. 침대 헤드에 깊숙하게 기대어 앉은 지민이 가방을 끌어가져가선 가방에 달린 키링을 톡톡 치면서 웃었다. 어제 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동그란 물체는 지민의 차 키에 걸려있던 피규어 키링이었다. 잭, 이던가.
"나는 다른 거 달았어. 그렇게 안 쳐다봐도 돼."
"다른 거?"
"응.“
잠시 망설이던 지민이 옆자리를 두드렸다. 끄트머리에 걸터앉아있던 나는 결국 지민의 옆으로, 침대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앉았다. 허벅지 위로 이불이 덮였다. 아 이런 게 한 이불 덮는 그런 건가.
"얘 애인."
"어?"
"샐리.“
가방을 침대 밑으로 내려놓으면서 대답한 지민이, 또 멍하니 되묻는 나를 쳐다보았다. 혀를 빼꼼 내밀고 눈을 접어 웃은 지민은 정말이지...
"오늘 이거 다 마실 건데."
"이걸 다?"
"응. 너 술 잘 마셔?"
"이거 다 마시면 뻗을걸."
"우와 잘 됐다.“
두 손을 모아 박수를 치며 해맑게 웃는 지민은 정말로...
"자고 가."
"어어?"
"자고 가, 정국아.“
예뻤다.
잭과 제로가 달린 키링. 그 옆에 잭의 연인 샐리.
침대 옆 협탁에 나란히 놓인 키링들을 보다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허벅지 위에 놓인 노트북에서는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을 지나고 있었고 지민은 영화 속으로 빠져들 것처럼 집중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저렇게 집중해서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영화를 보는 지민을 보았다. 술에 조금 취했다.
"왜?"
"...그냥."
"재미없어?"
"재밌어.“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묻던 지민은, 여즉 절 쳐다보는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있잖아."
"응."
"나 일본 가고 싶어.“
가깝게 붙어있던 지민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쭉 펴고 있는 허벅지가 서로 닿았고 어깨도 닿았다. 이불 속에 감춰놓은 내 손위로 지민의 손이 덮여왔다. 지금은 어제처럼 손이 시리지도 않은데 지민은 내 손을 꽉 쥐었다. 뜬금없이 일본에 가고 싶다고 말하면서 손을 잡는 게 무슨 뜻일까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당황해버렸다.
"도쿄 가고 싶어."
"도쿄?"
"응. 잭과 샐리 가면을 쓰고, 아니 뭐가 됐던 얼굴을 가리고 거리를 걷는 게 내 꿈이야."
"가면은 왜 써야 해?"
"다른 사람은 날 모르고, 나는 나를 알고. 가면 안에서 나는 자유롭잖아.“
도쿄 히로오에서 시부야까지 쭉 걷는 거야. 엄청 다리도 아프고 가면도 답답하겠지. 그래도 행복할걸.
감상에 젖은 눈을 한 지민이 아름다웠다. 노트북의 번쩍이는 불빛이 얼굴에 비추고 등 뒤로는 창에서 내리쬐는 달빛에 젖었다. 지민은 온몸에 빛을 감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야말로 할로윈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지민은 그래서 나에게 잭을 주었을까? 잭은 할로윈, 밤의 왕, 무서움의 끝이니까.
영화의 내용은 하나도 몰랐다. 그냥 그날 밤 내가 본 것은 온통 빛을 휘감은 지민이었다.
"있지. 너 시간 좀 있어?"
"왜."
"시간 좀 있으면 나한테 형이라고 해봐."
"싫어.“
단호하게 고갤 젖는 날 보다가 푸스스 웃은 지민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왔다. 여전히 이불 속에 있는 내 손위엔 지민의 손이 포개어 있었다. 나는 어제처럼 용기를 내었다. 지민의 손바닥을 간질이다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쥐었다. 작고 말랑한 손이 내 한 손안에 가득 담아온다.
"있지. 너 시간 좀 있어?"
"왜. 있으면 형이라고 해보라고 하려고?"
"아니이- 나랑 일본 같이 가자고."
"...어?"
"할로윈때... 갈래?“
순간 손바닥에서 땀이 베어 나왔다. 축축하게 젖어가는 손이 느껴졌지만 지민과 맞잡은 손을 놓기는 싫었다. 그와 동시에 할로윈이 10월이었던 걸 생각해버렸다. 생각'해버렸다'. 나는 그때...
"갈래?"
"너"
"응?"
"날 동정해?“
내 얼굴은 어둠 속에 묻혀있다. 마스크는 술을 먹고자 턱밑으로 끌어 내렸지만 아직 쓰고 있는 볼캡이 내 얼굴의 반 정도에 그림자를 만들어놓았다.
"뭐해."
"잠만. 동정 뜻 좀 쳐보고.“
대답을 않고 볼캡에 가린 내 눈만 뚫어져라 보던 지민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 와중에도 잡은 손은 떼지 않고 한 손으로만 열심히 검색하는 지민이 웃겼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입꼬릴 올리자마자 지민이 핸드폰을 얼굴로 들이밀었다. 얼른 입꼬리를 내렸다.
"동정. 명사.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김. 남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베풂.“
지민이 읊은 걸 눈으로 읽었다.
"혹시 너 어려워?"
"뭐?"
"혹시 내가 너한테 돈 줬어?"
"무슨 말이야."
"그럼 동정 아니잖아. 너는 어려운 처지가 아니고, 나는 너한테 물질적으로 도움 안 줬어.“
핸드폰을 끄고 옆에 던져둔 지민이 딱딱히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노트북 속 영화에선 우기부기를 처치하고 망가진 크리스마스를 찾기 위해 산타클로스가 떠나는 장면이 흘러갔다. 말없이 눈만 마주치던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얼굴을 가까이했다. 꼭 키스라도 할 것처럼.
"야"
"응"
"모자 벗으면 안 돼?"
"안 돼."
"모자 때문에..."
"그런 핑계가 어딨어.“
지민과 맞잡은 손을 이불 밖으로 꺼냈다. 깍지를 낀 손이 딸려 올라온다. 그 손을 끌어당겨 내 어깨 위로 올리자 지민이 손을 풀고 어깰 잡아왔다. 나는 손을 뻗어서 지민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았다. 조금 붙어오는 몸에 심장이 다시 마구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지민의 손이 닿은 어깨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모자 때문에 목을 최대한 꺾어 지민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코와 얼굴이 서로 닿고 조금 폭신하고 까끌한 입술이 닿았다. 입술만 닿았을 뿐인데 마치 서로의 심장이 닿은 것처럼 뜨거웠다. 헐떡였다, 내 심장이.
그 순간 윤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울리지 마.‘
절망스러웠다.
***
그날 밤 이후 나는 도망치듯 지민의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또 도망치듯이 한 학기를 미쳐 채우지 못하고 곧장 미국으로 향했다. 수술대에 오르면서도 지민의 생각에 미간이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을 채우는 짧고도 화려했던 나의 대학 생활과 지민과 말하고 감정을 나눴던 나흘이 꽤 아팠다. 괜히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추지 않았으면 머리로 끝났을 텐데, 입까지 맞춰서 입술에서도 아픔의 감정이 느껴진다.
수술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뤄졌다. 마지막 13차 수술이 끝나고 회복기에 접어들었을 땐 이미 일 년이 지나있었다. 지민은 뭐하며 살까, 날 기억할까, 날 그리워할까. 혹시... 날 잊은 건 아닐까. 일 년간 온통 지민뿐이었다. 내 세상은 수술에 성공한 얼굴도, 오래전 돌아가신 어머니도 아닌 온통 지민뿐이었다.
회복 기간인 1년여 동안 지루한 시간을 영화로 달랬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주야장천 돌려보았다. 잭과 제로를 보며 키링을 만지작거렸다. 그날, 도망 나오던 날 꼭 챙겨나온 키링.
여러 평론과 해설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중에서 제일 맘에 들었던 말이 있다.
'공포와 두려움, 놀라움으로 얼룩진 핼러윈의 감성으로 행복, 사랑, 평화 등의 따뜻한 감정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는 할로윈이란 어둠에 살던 잭. 나는 어떻게 해서든 행복, 사랑, 평화 등의 따뜻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빛으로 보인 것은 지민이 유일했다. 어둠 속에서 자란 내가 처음 본 빛은 지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나를, 나의 어둠을 좋아했다. 나를 구원하려 했다. 그는 단연 크리스마스였다.
영화의 결말처럼 나에게도 따뜻한 눈이 내리고 사랑을 이루고 노랫소리가 가득한 곳으로 변할 수 있을까.
지민 없이 그럴 수 있을까.
***
『제이. 어디로 갈 건가요? 한국?』
『아뇨. 일본이요.』
『오, 일본. 거긴 왜요? 고향인 한국으로 가지 않고.』
『곧 있으면 할로윈이니까요.』
『할로윈-! 저도 할로윈 좋아해요. 가서 기념품 보내줄 거죠?』
『꼭 보내드릴게요, 닥터 케빈.』
***
『요즘 그 친구는 안 오네요? 민? 이름이 민 맞나요?』
『맞아요. 민 요즘 바빠서 잘 못 와요. 한국에서 아주 바쁜 사람이라.』
『아쉽네요. 마지막 날이라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안부 부탁해요, 제이.』
『당연하죠. 나중에 민이랑 같이 들릴게요.』
***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타워가 보이는 숙소 말고 뒤편을 잡아놓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투명욕실이 눈에 띄어서 그냥 잡았는데 타워 뷰는 추가 요금이 붙는다고 했다. 돈이 없어서 그냥 뒤쪽으로 잡았는데 나쁘지 않았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구고 싶었지만 이왕 도쿄에 온 김에 디즈니랜드나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혼자 하는 여행, 아니 따지고 보면 여행이란 것 자체가 처음이라 조금 두근거렸다.
디즈니랜드는 사람이 차고 넘쳤다. 여러 모양의 머리띠를 하고 다니기에 나도 호기심에 기념품 숍에 들어갔다. 토끼... 고양이... 여러 디즈니 캐릭터 모양의 머리띠들을 보다가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게 하나 있었다. 잭과 제로. 꼬리처럼 달린 끈 끝에 제로가 달랑달랑 달려있었다.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아기자기한 회전 컵을 지나며 언뜻 미키마우스 모자를 쓴, 지민을 닮은 사람을 본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생각했다. 지민이 여기에 있을 리 없으니까.
호텔 룸서비스로 스테이크를 먹고 세상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밤 꿈에선 지민이 나왔다.
***
할로윈 당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얼굴에 여러가질 그려 넣고 예쁜 코스튬 의상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나도 캐리어에서 가면을 하나 꺼냈다. 오늘 밤엔 시부야까지 걸어갈 예정이었다.
검은색의 망토 같은 옷을 입고 배낭을 메었다. 가방 어깨끈 쪽에 달린 잭 키링을 한번 만지고는 가면을 깊게 눌러썼다. 얼굴을 가리는 어둠. 간만에 얼굴 전체를 완전히 가리고 밖으로 향한다. 색달랐다. 얼굴에 깊은 흉이 있었을 땐 마스크나 안경, 모자 없인 절대 나가지 않았었는데. 수술하고 얼굴이 깨끗해 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밝음에 적응이 되었나 보다.
히로오는 카페가 많다. 어디가 좋은지 잘 모르겠어서 그냥 대충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빈 테이블에 잠시 앉았다. 가면을 위로 올리고 커피를 홀짝였다. 밖은 사람들로 붐볐다. 깔깔거리고 찰칵거리는 소리. 시끌벅적한 소리들. 그것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행복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도 이제 저 틈에 끼어보려고 한다.
아무도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물론 일본이라 그렇겠지만.
이 년전에 지민과 영화를 볼 때 나눴던 대화가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날의 기억은 이 년이 지난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첫 키스이자 마지막 키스.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니까. 그날 이후로 지민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립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날 모르고, 나는 나를 알고. 가면 안에서 나는 자유롭잖아.‘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미치도록 아프게 맞던 내가, 처음으로 그런 것 없이 자유로이 거릴 거닐었다. 지금 내가 가면을 벗어도 사람들은 날 선 눈빛을 보내지 않겠지만 말이다. 지민이 말한 자유란 무엇인지 완벽히 알지 못하겠지만 어쩌면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국아!“
복작거리는 거리 한가운데에 멈추어 섰다. 환청인가? 수술하는 동안 하도 지민을 생각해서 환청이랑 환상이 보였던 때가 있었다. 근데 그거 이미 일 년 전부터 안 보였는데. 다시 병이 도진 건가.
"양송이!“
나는 가면을 쓰고 있는데.
"야, 진짜 너!“
날 찾아낸 넌...
"진짜 뒤질래?!“
단연코 빛이구나.
***
가면이 위로 들어 올려 벗겨지고 머리는 엉망이 되었다. 식은땀을 흘려서 가면 속에 있던 얼굴에도 땀으로 번들거리는데 그 얼굴을 스스럼없이 잡아챈다. 저처럼 가면을 쓴 누군가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빤히 올려본다. 이 눈높이, 이 키, 이 냄새. 나는 모두 알고 있다.
"짜증 나게 왜 더 잘생겨졌어?"
"박지민..."
"내 이름 기억나긴 하니?"
"여길 어떻게...“
어우 더워!
내 앞에선 사람이 가면을 위로 휙 올려 벗는다. 그 안에선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지민이 튀어나온다. 눈가가 뻑뻑해지는 느낌이 들고 귀와 뒷 목은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지민의 얼굴만 봤을 뿐인데 내 몸은 이렇게나 솔직하다. 많이 보고 싶었나 보다.
"어떻게 알고 왔어?"
"일단 됐고. 우리 얼른 가자."
"뭐? 어딜?"
"키스하러."
"뭐?“
내 손목을 잡고 이끄는 지민의 뒤통수가 말을 하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고. 나만큼이나 보고 싶었다고.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작은 골목. 지민은 내 가슴팍에 손을 올려 벽으로 쭉 밀어버리고선 목에 팔을 감는다. 매달리듯이 감아오는 팔에 내 상체는 저절로 숙여지고 지민과 이마가 닿았다. 가면은 이미 저 어딘가에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전정국아."
"응"
"형이라고 해줘."
"군대 갔다며."
"아씨... 민윤기지?"
"너도 윤기 형한테 형이라고 안 하네."
"아니 미국 가서 민윤기한테 특강 받았어? 말 왜 이렇게 잘해, 갑자기.“
도톰한 입술을 톡 내놓고 툴툴거리는 지민이 못내 사랑스러워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제 얼굴로 콧바람을 뿜으며 웃는 나를 보더니 저도 푸스스 웃어버리는 지민은 너무나도 예뻤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고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당겨서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이젠 코가 닿았다.
"나 그저께 제대했어."
"진짜?"
"응. 바로 날아온 거야."
"윤기형이 말해줬어?"
"응. 내가 스파이로 유용하게 써먹었는데. 너 몰랐지?"
"몰랐어.“
지민과 헤어지던 날 우연히 집 앞에서 윤기를 만났고, 미국으로 와서 수술 후 회복하는 동안 병원 앞에서 윤기를 만났었다. 윤기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모든 사정을 다 듣고 돌아가더니 한국에서 간간이 지민의 소식을 전해왔다. 병원으로 몇 번 놀러도 와서 닥터 케빈과도 친해졌었다.
근데 그 민윤기가 지민의 스파이였다니.
"있지. 너 혹시 지금 시간 있어?"
"없는데."
"엉?"
"내 시간 다 니 꺼야. 그래서 나 시간 없어."
"진짜? 아싸. 그럼 우리...“
지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술을 머금었다. 땀에 젖어 조금은 짭짤하고 나는 커피를 마셔서 조금은 썼던 그 키스. 안쪽을 침범하면 무척 단 혀가 날 반겨주는 그런 키스. 지민은 입을 맞추며 내 어깨끈에 붙은 잭을 만지작거렸고, 나는 지민의 뒷덜미를 잡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지민이 이따금 내 오른쪽 얼굴을 만질 때면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빛을 안아버린 나는 온통 뜨거워졌다. 눈이 뜨거운가 싶더니 결국 눈물이 똑 떨어졌다. 지민은 살짝 눈을 떠서 그런 날 보고, 엄지로 얼굴을 문질러 눈물을 닦아냈다.
"하아- 형..."
"...뭐?"
"형. 지민이 형."
"미쳤다... 왕 섹시해.“
푸핫, 지민이 입까지 틀어막으며 말하는 소릴 듣다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지민의 어깨로 얼굴을 묻으며 와르르 쏟아지듯 웃자 지민도 깔깔 웃어버렸다. 닿은 몸 사이로 심장 소리가 들렸다. 쿵, 쿵. 같은 빠르기로 같이 뛰고 있는 심장이 지금 내가 살아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정국아."
"응."
"호텔가자."
"응."
그리고 우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마주 잡고 호텔을 향해 뛰었다.
fin.
-『』대화는 영어입니다.
